지난 연말의 폭설로 영산(靈山) 한라산은 눈으로 덮여 한층 더 신비스러운 자태를 뽑내고 있었다.
제주도의 중심에 우뚝 솟아있는 한라산은 어리목, 영실, 성판악, 관음사, 그리고 동백길의 종점인 돈내코등 다섯개의 등산로가 갖춰진 대한민국 남단 최고의 명산임에 이의가 없는 사계절이 아름다운, 일찌기 2007년에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세계속의 명산이 된지 오래된 우리의 자랑이자 우리가 잘 보존해서 후세에 물려주어야할 우리의 자존심인 자연유산이다.
1981년 여름 방학때 선배들과 처음 제주를 찾아 올랐었던, 추억이 가득담긴 어리목으로 향했다.
돈내코 코스가 서귀포를 내려다보는 등산로라면, 어리목은 제주도의 북서쪽을 내려다보는 등산로쯤 되지않나 싶다.
물론, 정상의 백록담 분화구를 내려다 볼수있는 성판악과 관음사코스와는 달리, 백록담의 남쪽 뒤태가 올려다 보이는 윗세오름 까지 가는 등산로이긴 하지만, 80년대 후반 까지만해도 남벽을 타고 분화구에 올랐었던 기억이 새롭다.
코스가 워낙 험난할 뿐만아니라, 무분별한 자연경관의 훼손이 심각해짐에 따라 지금은 남벽에서 오르는 등산로는 폐쇄되어 있음이 조금 아쉽긴 하지만, 30여년전 어리목에서 두어번 올랐었던 백록담 분화구의 추억을 아련히 떠올리면서,
아이젠과 스패츠를 장착하고 스틱과 셀카봉을 손에 들고, 어리목을 지나 겨울 한라산으로 가볍게 발걸음을 재촉했다.
시작 부터 범상치 않은 설국(雪國)의 환영을 받으며, 약간은 흥분된 마음을 억누르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겨본다.
어리목코스는 초반부 약 2.4km 정도의 약간 부담스러운 오르막만 지나면 놀맹놀맹 즐기면서 걷기 좋은 길이다.
패딩과 보온모자등 겹겹히 싸매고 시작된 산행이 고도가 높아져 영하5도 이하로 내려가는 기온과는 달리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 패딩 대신 방풍자켓으로 갈아 입고 막바지 오름에 젖먹던 힘을 다해본다.
발 아래 운무가 있고, 운무 아래 북제주가 내려다 보이는 사제비동산에 올라서니 세상이 달라보이고, 만세동산 너머로 우뚝선 백록담 북벽의 머리가 반갑고, 눈이 시리게 파란 하늘과 조각구름과 능선을 가득 채운 눈과 조화로운 한라산이 가슴을 벅차게 만든다.
유럽의 지붕이라 불리우는 융프라우 못지않은 우리의 한라산 설경은, 백록담이 있는 북벽이 점점 가까워 오면서 서쪽의 능선이 눈에 덮여 넓은 설원(雪園)을 이루고 뭉개구름이 설원의 끝과 만나 백록담으로 흐르다 다시 내려오기를 반복하면서 신비로운 절경을 연출한다.
해발 1,700미터인 윗세오름을 불과 100미터 정도 남겨놓고, 구름위의 한라산 상부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신비를 넘어 황홀하기 이를데 없다.
화물 운반용 모노레일이 자연경관을 해치지 않나 싶은 불편한 마음을 제외하고는, 파란 하늘과 그 아래 설원 가운데에 서서 느끼는 신비로움속의 황홀경은, 나의 미천하고 모자라는 글 재주로는 차마 설국한라(雪國漢拏)를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음이 못내 아쉬울 따름이다.
윗세오름 대피소에서 바라본 아스라이 구름속의 백록담 북벽을 바라보는 탐방객들의 야외 쉼터가 을씨년 스럽게 두꺼운 구름에 뒤덮인 영실쪽 탐방로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휴게소 운영이 중지되었다는 등산로 입구의 안내문을 모르고 달랑 물한병만 들고, 아이젠도 스틱도 없이 시커먼 롱패딩만을 입고 힘겹게 오른 말레이시아 에서온 커플에게 넉넉하게 준비해간 간식을 나눠주니, 몇번이나 고맙다는 인사를 거듭하고, 그들의 기념셀카에 출연요청을 받고 흔쾌히 응해주었다.
비록, 힘겹게 등반한 그들 이었지만, 따스한 추억으로 우리의 한라산 등반이 기억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윗세오름 가장 높은 능선에서 멋드러진 주목아래 펼쳐진 눈덮인 북쪽능선을 내려다보고, 백록담 남벽을 까마귀와 나란히 바라보다가 백록담 봉우리가 구름에 휩싸여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는것을 보고나서야 하산을 시작하여, 오전 9시 15분에 출발했던 어리목을 7시간을 거의 채운 오후 4시경 출발지점으로 회귀하여 무사히 행복한 겨울 한라산 등반을 마무리 했다.
그리고......,
어리목에 내려오니, 1,500고지에서도 산 중턱 구름이 아름다웠고, 하늘은 가끔 구름에 가리긴 했지만, 파란하늘과 구름과 눈이 환상적인 앙상블을 이뤘건만, 구름에 갇혀버린 한라산은 사방이 분간이 되질 않았다.
마치, 삶의 힘든 순간을 맞닥뜨렸었던 그 때처럼, 갑자기 우울해졌다.
그러나, 현실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산을 조금만 오르면, 파아란 하늘과 예쁜 새털구름을 볼수 있듯이, 나를 믿고 인내하면서 조금만 앞으로 나아가면, 생각지 못했던 삶의 지혜와 의지가 발현되어 내가 몰랐던 희망의 불빛이 내 남은 삶을 밝고 안전한 곳으로 인도해 주지 않을까, 막연하게나마 영산 한라산을 뒤로하며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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