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03. 29.
2019년 1월초 이래로, 생각지도 못했던 2년간 공무원양성기관에서의 다사다난했던 기억들을 뒤로하고, 2년만에 제주를 찾는 마음이 설레임으로 가득했다.
시작은 다분히 뭍에 예보된 황사의 전례없던 횡포를 피하려는 의도였지만, 죽을 수만 쓴다는 머피의 법칙과도 같이 하필 이번 황사의 공습으로 제주의 미세먼지 농도가 극심했던 수도권의 3~5배를 웃도는 웃픈 현실을 뒤늦게 인지하고서도 하릴없이 김포공항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야했다.
김포공항 출국장에는 평일 임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많은 여행객들이 살짝 붐비고 있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강조하는 이 시국에도 여행객들은 아랑곳 않고 그들만의 일상을 즐기고 있었다. 더우기 기내에서는 거리두기는 커녕 가림막도 없이 비좁은 공간에서 다닥 다닥 붙어 앉아야하는, 왠지 불안하면서도 적응이 쉽지않은 낯선 풍경의 개체가 되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탈하게 제주를 향해 비행기가 멋진 밤을 날았다.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힐 즈음 미처 마음의 정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깊어질대로 깊어진 제주의 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코로나19 팬데믹과 초유의 미세먼지 공습으로 인해 마스크를 제대로 벗지도 못한 채로 불안하게 밤을 지새고, 오전 9시로 예약한 렌트카를 인수하러가기 위해 호텔에서 부터 약 2km 떨어진 렌트카 회사에 들러 차를 인수받자마자, 제주의 3대 해장국중 가장 선호하는 은희네 소고기 해장국으로 빈속을 채우고, 표선면의 가시리 녹산로로 향했다.
제주시 노형동에서 40여분을 열심히 달리다, 녹산로에 접어드니, 키작은 노오란 유채꽃과 지난 주말 내린 폭우로 꽃잎이 거의 자취를 감춘 연분홍 벚꽃님들이 마치 노란 치마에 연분홍 저고리를 입은 아리따운 봄처녀를 연상시키는 앙상블로 잠시나마 속세의 온갖 걱정과 시름을 잊게 했다.
생각보다 적잖은 관람객들이 줄을 서서 유채꽃밭에 진입하기 전, 체온측정등 방역수칙을 차례차례 지키면서, 광활하게 펼쳐진 샛노오란 유채꽃 들판에서 동심으로 돌아가, 코로나19 팬데믹과 초유의 황사와 미세먼지 공습을 잠시 잊은 채로 봄을 만끽하고 있었다.
조금 아쉬운 마음으로 녹산로를 뒤로하고, 남원포구에서 시작하는 올레길 4코스의 초입에 자리잡고 있는 금호리조트 앞 큰엉의 드넓은 바다는, 황사가 파아란 하늘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바닷색은 여전히 짙은 코발트빛을 발하고 있었고, 청초한 들꽃이 반겨주는 큰엉 산책길의 한반도 정원앞에는 젊은 청춘들이 쌍쌍이 포토존에서 긴줄로 늘어서서 서로 포즈를 취하고 셔터를 쉴새없이 눌러대고 있었다. 카메라를 높이 들어 한반도 모형를 재빨리 찍고 쇠소깍으로 달리다가, 다 졌을거라 알고 있으면서도 동백꽃이 궁금해서 혹시나 하고 위미의 동백 군락숲으로 우회해 보았지만, 동백숲은 초록빛 동백잎만 무성했고, 작은 이면도로 길섶 동백에 달린 오밀조밀한 꽃님들이 그나마 작은 위안을 주었다.
올레길 5코스 종점이자 6코스 시작점인 쇠소깍은 짙은 황사로 뿌옇게 보이는 바다와는 달리 협곡을 가득 채운 에메랄드빛 바다위를 한가로이 즐기는 연인들의 카누 레이스에 살짝 미소가 지나간다.
쇠소깍을 지나, 올레길 6코스 중간쯤에 있는, 백두산의 천지를 닮았다하여 이름 붙여진 작은 천지인 소천지가 극심한 미세먼지와 황사가 태양을 가려 흐릿한 세상을 만들었지만, 여전히 맑은 소천지의 에메랄드빛 바다가 주는 위안을 한껏 받으며 구석구석 소천지를 음미하고 소정방폭포로 향했다.
정방폭포와 마찬가지로 해안직소 폭포인 소정방폭포 언덕위에 있는 관리소는 올레길 6코스의 중간 스탬프가 비치되어 있어, 올레길 걷던때 몇번 들렀던 기억이 있지만, 오늘 처럼 여유롭게 소정방폭포 아래로 내려와 물방울이 튕겨대는 아담한 폭포줄기를 직접 바라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색다른 기분으로 살짝 설레였다.
점심 끼니도 잊은 채로 달려간 황우지해안의 열두동굴과 선녀탕을 지나, 야경을 예약한 멀리 보이는 새연교를 뒤로하고 외돌개를 한바퀴 돌고, 습관처럼 참새가 방앗간 들리듯, 외돌개 입구의 카페에 들러, 허기진 배를 한라봉과 귤을 착즙한 시원한 쥬스 한잔으로 쓰담쓰담 달래주었다.
외돌개에서 호텔로 돌아와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올레시장을 한바퀴 돌고, 푸짐하게 저녁식사를 마친 후, 언제나 처럼 천지연 폭포와 서귀포항을 지나 새연교에서 하루를 마무리하러 갔다.
아뿔싸!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더니,
새연교 아치의 시시각각 변하는 퍼포먼스가 사라졌다. 아마도 코로나19가 새연교의 야경을 잠시 빼앗아가 버린듯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귀포항의 밤은 여전히 아름다운 빛을 쏟아내고 있었고, 인적이 끊긴 듯 조용한 새섬을 한바퀴 돌아나오면서 어렵게 시작했지만, 숨가빴던 제주에서의 첫날 이야기를 아쉽잖게 갈무리하는 서귀포의 밤은 깊어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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