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05. 05.
배론성지에서 만났던 봄은
공기마저도 달콤하고 아늑했습니다.
더욱이 마스크 없이 걷던
산책로의 초록 내음과
오래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체취가 느껴지는
짙은 모란 향기에 흠뻑 취해도 보고
이제는 희미해진,
어머니와 함께했던 어린이날의 기억 조각들을
하나둘씩 맞춰보는 어린이날이기도 했습니다.
다산 정약용의 조카사위인 황사영의 묘소도
황사영의 아내 정난주마리아의 묘소도
황사영과 정난주마리아의 아들인 황경한의 묘소도
배론성지에는 없지만,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젊은 황사영은
신유박해의 부당함을 알리고자
제천 배론의 옹기 굽는 토굴에서
백서를 작성하다 발각되어
젊은 나이에 서대문 밖에서
살아있는 상태로 살이 저며지고
사지가 잘리고,
끝내는 머리를 잘려 효수당하는
참혹한 능지처참형에 처해져
경기도 양주의 홍복산에 묻혀있고,
그의 아내 정난주마리아는
하루아침에 관비로 제주도에 유배되어
평생을 노비로 살다가 한만은 생을 마치고
대정읍의 모슬봉 자락에 묻혀있고,
그들 부부의 두 살배기 아들 황경한은
어머니를 따라 배를 타고 제주 유배길 중에
아들만큼은 노비로 살게 하고 싶지 않은 모정이
추자도 예초리 어부의 양자로 살게 했으나,
평생 제주 쪽 바다만 바라보며 어머니를 그리다
예초리 산기슭에 잠들어 있으니,
황사영 일가의 가슴 아픈 사연의 시발지인
배론성지에 올 때면 나도 모르게 숙연해지고,
너무나 오랜 기간 큰 복을 누리고 살고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 태산만큼이나 커지곤 합니다.
김대건 신부와 함께 청나라에 유학을 가서 동문수학을 했지만, 김대건 신부 보다 조금 늦게 사제의 서품을 받은 최양업 신부의 묘소와 기념성당이 있는 배론성지가 황사영 일가의 정원 같이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찰나 같은 인생보다도 더 찰나 같은 젊은 부부와 어린 아들의 단란했던 가정생활이 이곳 배론성지에서 그들의 넋이라도 오래도록 함께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어린이날을 맞아 더욱 간절한 소망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에 재삼 탐욕스러운 욕망의 노예로 살아왔던 지난날들을 반성하며 따스한 봄날을 배론성지에서 감사히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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