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1. 21.
청송의 주왕산국립공원 내에 있는 주산지는 축조된 지 300여 년이나 지났지만, 20여 년 전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촬영지로 세상에 알려진 이래로 셀 수 없이 많이 다녀갔건만, 유독 단풍이 절정을 이루는 시기에는 한 번도 다녀간 기억이 없고, 봄과 여름과 겨울에만 다녀갔고, 이번에도 가을이라 하기에는 다소 억지스러운 영하 5도를 밑도는 새벽 늦가을의 끄트머리를 붙잡은 채로 어스름한 어둠을 뚫고 주산지를 향해 발길을 재촉합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첫 번째 전망대 앞의 기묘하게 생긴 수령을 가늠하기 어려운 버드나무가 여전히 건장하게 주산지의 수호신처럼 시시각각 여명이 밝아오고 아침해가 떠오르는 방향과 강도에 따라 다양한 색조로 변신하는 앙상한 나뭇가지가 멋진 데칼코마니를 연출하며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주산지 끄트머리에 있는 전망대로 가는 길에서 내려다 보이는 물속에 뿌리를 내린 각종 버드나무와 멋진 데칼코마니를 연출하고 서있는 소나무가 감탄을 자아내게 하고, 말라비틀어진 단풍이 고운 색으로 사랑받던 가을과의 긴 이별을 준비하고 있는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주산지의 쓸쓸한 모습에서 말년이 아름답지는 못했지만, 한때는 촉망받던 영화감독이 머나먼 타국 땅에서 그의 명성을 세상에 널리 알리게 해 준 주산지의 사계를 추억하며, 씻을 수 없는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하면서, 또다시 봄 같은 재기를 꿈꿨을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움과 쓸쓸함이 함께 스며들어 있는 듯 보입니다.
조금씩 어둠이 가시고 주산지에 햇살이 찾아오면 팔색조처럼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물속의 버드나무들이 애절한 무희들의 흐느적거리는 마지막 춤사위처럼 만추를 아름답게 수놓아줍니다.
천천히 걸어도 오분 남짓한 주산지 끄트머리 전망대 앞에는 오랜 시간 사시사철 물속에 몸을 담고 주산지의 신비를 사계절 내내 간직한 채로 참고 참았다가 기나긴 겨울을 견뎌내고 새봄을 맞게 될 버드나무의 지혜로운 인내를 배워봅니다.
강렬한 아침해가 만들어내는 호화찬란한 데칼코마니를 보면서, 언뜻 오스트리아의 동화마을 할슈타트의 데칼코마니에 견줘 전혀 뒤지지 않다는 찬사를 보냅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만추 속 주산지의 쌀쌀하지만 잡티하나 없고 구름 한 점 없는 맑고 깨끗한 아침의 황홀경에 흠뻑 빠진 채로 미련 없이 가을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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