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0. 04.
코로나19 펜더믹 이후 발길을 끊었던 제천 모산비행장은 당시만 해도 용도 폐기된 상태로, 제삼자에게 매각한다는 설과 문화공간으로 시민들에게 돌려준다는 설 등이 설왕설래했었기에, 나그네는 더 이상 꽃구경 하기는 힘들겠단 생각도 들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지나는 길에 옛 추억을 회상할 겸 잠시 들러보기로 했습니다.
예전 그대로라면 백일홍이 시들시들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백일홍이 있던 활주로 남동쪽 끝 부분에는 흔히 나비바늘꽃이라 불리기도 하고 영어 이름으로는 가우라(Gaura)라고 하는 홍접초(분홍바늘꽃)가 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살짝 흩뿌리는 비를 맞으며 바람에 살랑살랑 진분홍 파도가 일렁이듯 기대하지 않았던 진풍경을 연출하고 있음에 흥분된 마음으로 과거에는 주차장으로 온전히 제공되지도 않았던 활주로에 주차 안내원까지 배치된 채로 관람객들을 맞고 있는, 아직은 여유가 많은 주차장 깊숙한 곳에 거칠 것 없이 맘 편히 주차를 합니다.
물론, 예전과 같이 입장료도 없고, 개방된 활주로 주차장은 주차요금도 없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어찌 알고 몰려드는지 하나 둘 자동차들이 들어오고, 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삼삼오오 몰려다니는, 갑자기 시끌벅적해진 활주로를 에워싼 가을꽃들로 포위된 끝과 끝이 아련히 멀게 보이는 모산비행장 활주로에는 한 대도 없는 비행기 대신 자동차와 구경 온 사람들로 시나브로 북적이기 시작합니다.
활주로를 열심히 걷는 사람들은 아마도 주변에 거주하는 제천 시민들임이 분명했고, 자동차에서 내리는 주로 나이 든 사람들은 외지에서 구경 온 사람들로 보였는데, 그들이 한데 어울리니 넓은 활주로가 제법 사람들로 분주해 보여, 어쩌면 모산비행장이란 이름으로 계속 시민들을 위해 존재하게 될지도, 그래서 나그네도 전처럼 매년 가을마다 가을꽃들을 만나러 와도 될 것 같은 막연한 기대를 하며, 가을꽃의 향연이 펼쳐진 비행장 활주로 정원을 구석구석 누비고 다니느라 이른 아침 내린 비로 젖어있는 풀잎을 밟아, 작년 가을에 새로 구입해서 아끼느라 얼마 신지 않았던 트레킹화도 흠뻑 젖고 무릎 아래 바짓가랑이 까지도 흠뻑 젖은 상태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없이 쪼그리고 앉았다 섰다를 반복하며 홍접초들과 들뜬 마음으로 첫 대면을 이어갑니다.
오전 열 시쯤 되어 구름이 걷히고 이따금씩 파란 하늘이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는 사이사이에 파스텔색 하늘과 "섹시한 여인"이란 꽃말이 정말 잘 어울리게 하늘하늘 잔잔한 바람에도 가는 허리를 흔들어대며 뭇 사내들의 애간장을 녹일듯한 요염한 자태에 흠뻑 빠져, 이곳이 정녕 용도폐기된 비행장 활주로인지, 아니면 세계적인 미인을 뽑는 미인선발대회장인지 나그네는 잠시 몽롱해집니다.
몇 바퀴 돌고 돌아도 수십만 수백만 송이 홍접초들과 일일이 눈맞춤하기엔 시간적으로나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했기에 잰걸음으로 왔다 갔다를 얼마를 반복했던지 녹초가 다되어 근처 벤치에 앉아 잠시 쉬면서, 다음 일정을 위해 홍접초와의 아쉬운 이별을 준비합니다.
회자정리라고 했던가요?
잠자리가 지나간 자리에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남아있는 홍접초의 쓸쓸해 보이는 모습이 흡사 "떠나간 이를 그리워함"이란 애절한 꽃말을 연상시키는 듯합니다.
홍접초 위를 맴도는 잠자리가 수없이 홍접초 사이를 날아다니며 수없는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모습에서 지금껏 살아오면서 만나고 헤어졌던 수많은 인연들이 한 편의 파노라마가 되어 스쳐 지나가고, 앞으로도 지속될 회자정리 거자필반(會者定離 去者必返)이란 법화경 속의 문구를 되새기며,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또 만나는 인연들 속에서 거듭되는 윤회(輪廻)의 삶이 나그네를 조금 더 겸손하고 성숙하게 만들 듯싶은 조금씩 조금씩 짙게 익어가는 가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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