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하면서도 아름다운 봄의 화신 모란이 지기 시작하고, 봄과 여름을 이어주는 열정이 가득 담긴 어여쁜 작약이 만발하기 시작할 즈음, 동네 산책길 산수국이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고, 유월 초순 가평의 자라섬에는 온갖 수국이 만개했지만, 나그네의 마음을 빼앗기에는 색감이나 질감면에서 다소 부족했기에, 유월 중순 즈음에 세계적인 유명화가가 심혈을 기울여 영겁의 시간에 걸쳐 탄생시킨 걸작에 비유해도 전혀 손색이 없어 보이는 (제주도) 우도수국꽃길의 파란수국과 분홍수국과 흰수국 등 돌담과 야자수와 바다를 배경으로 수국 가족들이 중심이 된 아름다운 천상의 풍경을 기꺼이 영접했었고, 해 질 녘 (서귀포) 남원해안도로변에는 지중해를 방불케 하는 환상적인 주변 환경에 잘 어울리는 울긋불긋한 지중해식 수국정원뿐만 아니라, 흐린 새벽 한라산 백록담 남벽을 바라보는 (서귀포) 토평동 중산간도로 옆 과수원 길을 가득 채운 꿈 속에서나 만남 직한 보라색 수국 돌담길과, 붉은오름입구 사려니숲길의 아직은 만개했다 하기에는 다소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깜찍하게 막 개화를 시작했던 곱디고왔던 산수국과 더불어, (제주시) 남국사와 잘 어울리는 파란수국과 산수국이 속세의 말 못 할 사연을 가슴에 한가득 품고 출가해서, 방금 삭발을 마친 듯한 동자승의 풋풋하고 깜찍한 모습이 가슴 아리게 연상되지만, 가평의 자라섬에서 부족함을 느꼈었던 나그네의 마음을 빈틈없이 채워주기에는 더할 나위 없었습니다.
유월 하순부터 시작된 지루했던 장마를 보내고,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시작된 역대급 폭염 속에서, 수국도 산수국도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파리하게 꽃봉오리를 만들기 시작하던 집 앞 근린공원의 나무수국이 간헐적으로 내리던 빗속에서, 가을을 준비하는 우아한 청순함으로 꽃잎에 영롱하게 맺혀있는 빗방울 까지도 그대로 품어주며, 자애롭고 순결한 순백의 자태로, 산수국과 수국의 뒤를 이어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시작된, 지긋지긋했던 폭염의 끄트머리에서, 아직은 여름이지만, 마치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맞은 듯한 명현현상(瞑眩現象)을 떠오르게 하는, 불현듯 기다리던 가을 분위기를 물씬 풍기게 하는 비요일 새벽의 나무수국이 수줍고 정갈한 자태로 나그네의 지친 마음을 어루만지고 달래주며 부지불식간에 사로잡습니다.
머잖아 나무수국은 가을 속에서 누렇게 퇴색되어, 겨울에 눈이 내릴 때면 그대로 흰 눈을 머리에 이고, 녹았다 얼었다를 반복하며 새봄을 맞을 것이고, 새잎이 나오는 산수국이 개화를 시작할 즈음, 누렇던 꽃잎이 봄볕에 마르고 말라 서서히 닳고 닳아서 없어질 때까지 긴 여정을 함께하겠지요.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인류의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탐욕과 이기심으로 인해, 시간이 갈수록 더욱더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는 지구온난화가 극지방의 거대한 빙산을 점점 빠른 속도로 녹이면서 해수면을 급격하게 높이고, 기화된 수증기가 사방팔방에서 비구름을 만들어 폭우와 폭염과 통제 불능하고 예측 불허한 산불과 더불어, 반복하여 범람하는 강과 해안을 덮치는 쓰나미가 지구촌을 혼란스럽게 하지만, 아직 까지는 '계절 이기는 장사가 없다'는 슬기로운 조상들의 의미 있는 격언에 무한 신뢰를 보내고 싶은 작은 믿음의 끈을 붙잡고, 비록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살짝 사납기는 하겠지만, 가을을 기다리는 설렘과 반가움으로 수요일의 문을 살포시 열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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