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03. 17.

작은 천지(小天池)가 있는 서귀포 보목동 바다는 꽃샘추위의 원흉이 된 강풍으로 말미암아 설산 한라의 데칼코마니마저도 잔잔한 파문으로 보일 듯 말 듯 삼켜버리고, 나그네는 강풍에 몸을 맡긴 채로 윤슬이 점점 짙어지는 소천지에서 한 시간여 무료하게 해넘이를 기다립니다.
강풍의 도움인지, 구름이 오래 머물지 못하는 하늘은 푸르름이 가을 못지않고, 문이 닫히면 또 다른 문이 열리듯이 먹구름의 훼방 없이 오랜만에 완벽한 해넘이를 볼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을 높이면서 소천지에서 구름이 완전히 벗겨져 선명하게 바라보이는 설산 한라의 백록담 남벽이 오늘따라 오묘하게 눈에 들어옵니다.

피그말리온의 간절함이 돌을 깎아 만든 여인상에 생명을 불어넣었듯이, 새봄을 기다리는 간절함에 응답하기 위해, 하늘이 봄을 확정 짓는 예방주사 같은 꽃샘추위를 먼저 보낸 것 같이, 길가의 돌멩이도 나름의 존재 의미가 있음을 인정하듯, 오늘도 찰나의 해넘이를 세상에서 가장 약한 존재인 나그네가 간절함으로 기다립니다.
그리 두껍지 않은 해양의 먹구름이 강풍에 흩어지며, 강력한 저녁해가 구름을 뚫고 하루를 마감하려 합니다.
소천지에서 어렴풋이 시야에 들어오는 소낭머리 뒤 서귀포항을 넘어가는 저 해가 윤회의 시간을 보내고, 12시간 전, 성산일출봉을 넘어 소천지 뒤쪽의 보목포구와 섶섬을 넘어왔듯이, 12시간 후, 또다시 같은 윤회의 시간을 반복하겠지만, 낮의 길이가 조금씩 늘어나도록 분초가 시나브로 앞당겨지는 희망을 품듯이, 우리의 진정한 봄도 한 발짝 한 발짝 가까이 다가오기를 피그말리온의 간절함으로 간구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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