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03. 17.

의도한 바는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3개월 전인 2024년 12월 17일의 사려니숲길은 마치 겨울이 오지 않은 채로 낙엽이 겹겹이 쌓여 있는 가을 같은 분위기였기에, 겨울을 건너뛰려는 사려니숲길 신선들의 의지가 아니었나 싶었는데, 재작년 1월의 사려니숲길은 눈이 두껍게 쌓여 있었고, 작년 1월과 12월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눈을 볼 수가 없었는데, 봄맞이 제주에 온 나그네를 환영하기 위해서 꽃피는 3월에 축복의 폭설을 내려주시니 봄 맞으러 온 사려니숲길에는 아직 봄이 오지 않았나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 내린 숲길과 옅은 뭉게구름이 파란 하늘을 타고 봄을 데려올 것만 같은 꽃샘추위마저도 정겨운 자연의 보고 사려니숲길에서 마냥 행복합니다.

오랜만에 보는 무장애 데크길의 하얀 눈이 이제는 할머니가 되신 수줍고 순결한 누이를 만나는 듯싶어 설레고, 발걸음은 저절로 무장애길이 끝나는 미로숲길로 향합니다.
간간이 새소리가 귓전을 울리고,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듯싶은 눈길 위에 조심스레 발자국을 남기니, 제법 뽀드득 눈 밟히는 소리에 계절의 감각은 무방비로 무뎌집니다.

삼나무 오솔길 산책로 720미터가 거의 끝나는 지점에서 나그네를 기다릴 세복수초 군락에는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잠꾸러기 아가씨들이 눈 속에 파묻혀 바짝 오므리고 있습니다.
혹시나, 그녀들이 깰까 봐 살금살금 사려니숲길의 중간지점인 물찻오름 입구로 향합니다.
물찻오름 입구까지 갔다 오는 동안 세복수초 아가씨들이 화사하게 웃으며 반겨주길 기대하면서 길을 재촉합니다.
물찻오름 입구를 갔다 와도 겨우 오전 11시, 너무 이르다는 생각에 세복수초 군락 직전의 삼나무 숲 속 산책길을 하릴없이 한 바퀴 돌고 나옵니다.

야속하게도 세복수초 아씨들은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있습니다.
아쉽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꽃샘추위의 훼방으로 함박웃음 짓는 세복수초를 사려니숲길에서는 만나보지 못할 듯싶습니다.

석 달 전만 해도 '붉은오름사려니숲길입구'라고 적혀있던 안내판이 '남조로사려니숲길입구'로 바뀌었네요.

물찻오름 입구가 이제는 나그네의 마라톤 코스 반환점처럼 5.4km를 찍고, 되돌아갑니다.
과거 비자림입구까지 가보기도 하고, 비자림입구에서 남조로사려니숲길입구까지 왕복으로 걷기도 해 봤지만, 남조로사려니숲길입구에서 물찻오름 입구까지 왕복 10.8km를 걸으면서 만나지는 풍광이 정말 압권이 아닌가 싶습니다.




또한, 남조로사려니숲길입구에서 시작되는 사철 푸른 거대한 삼나무의 열병식을 즐기며 걷는 길은 지구상에서 사려니숲길만이 지닌 매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직 까지는 입장료도 무료, 주차료도 무료인 천연의 보고 사려니숲길을 잘 이용하다가 후세에 잘 물려줘야겠다는 다짐을 해보며, 산수국이 반겨주고 순백의 때죽나무 꽃이 만발하고, 거대한 산딸나무에서 만개하는 꽃과 상아빛깔 누리장나무 꽃이 그리운 6월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예기치 못했던 3월의 꽃샘추위를 달래며 사려니숲길과의 짧지만 긴 이별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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