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1. 01.
어느새 발 밑에 낙엽이 수북하게 쌓여 밟히고, 지나가는 산들 바람에도 힘없이 떨어지는 낙엽이 내 마음과 같습니다.
한라산둘레길 첫번째 코스라는 천아숲길을 역올레하듯 제2코스인 돌오름길 입구에 등을 보이고, 한라산둘레길 제1코스 시작점인 천아수원지를 향해 8.7km의 여정을 아침 일찍(8시 다된 시각) 시작합니다.
보림삼거리를 지나자마자, 만산홍엽(滿山紅葉)의 진면목을 만끽하면서, 가을이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지나가는 느낌을 받으니, 내 발걸음도 내리막 오르막이 반복되는 재미진 길을 따라, 낙엽 밟는 소리와 산새들의 지저귀는 소리와 살짝 얼어버린 얼굴에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살을 받으며 속절없이 가을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숲은 터널을 이루고, 불이 난듯한 터널 안팎의 울긋불굿한 절경은 말로 다 표현할수 없어, 연신 뜻 모를 감탄사를 연발하며 사방팔방 둘러보는 눈이 바빠지니, 셔터를 눌러대는 엄지 손가락이 쉴틈이 없습니다.
황홀한 천아숲길을 한참 오르락 내리락하다, 삼나무군락지를 만나면, 분명 산아래 천아수원지 가는 길이 내리막이 아니고 오르막인것에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피톤치드가 가득한 초록의 삼나무 숲길을 쉬엄쉬엄 큰 호흡하며 지나다, 노로오름삼거리를 만나니 천아수원지 내려가는 길이 보이는것 같아 안심이 됩니다.
마침내 천아수원지가 눈 앞에 펼쳐지지만, 깍아지른듯 가파른 내리막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물론, 천아수원지에서 빈틈없이 줄 서서 올라오고 있는 사람들에 비하면 아무리 가파른 길이라도 내려가는 길이 좀 더 수월하긴한데, 오죽 힘이 들면, 얼마나 남았냐고 내려가는 사람들에게 묻고 또 묻습니다. 대답은 언제나 거의 다 왔다고 안심되는 답을 하는게 일반적이긴 하지만, 실제로 깍아지른듯한 오르막은 그리 길지가 않아, 얼마 안남았다고 답을 했는데, 올라오던 아주머니 한분이 웃음띤 얼굴로 최헌이 부른 '앵두' 첫 소절을 조금 개사해서 부릅니다.
"믿어도 되나요? 당신의 그말을~~~"ㅎㅎㅎ
힘든 상황에서도 해학을 즐길줄 아는 여유는 역경을 딛고 이겨낸 연륜에서 나오지 않나 싶습니다.
역시나, 천아숲길의 백미라고 할수 있는 천아수원지의 절경은 새벽 일찍 부터 준비하고 나온 노력에 합당한 보람을 안겨줍니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한동안 높은 바위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고 있을뿐, 눈 앞에 펼쳐진 장관에 무장해제되어 자동으로 미소가 지어집니다.
천아숲길 전장 8.7km에다, 천아수원지에서 1100고지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2.2km를 걸어 나와야 하기에, 오늘의 트레킹 총 거리는 그럭저럭 11km를 넘겼지만, 아직도 한번 더 천아숲길을 걸을것만 같은 힘이 남아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천아숲길을 걸으며 활홀경 속에서 생성된 엔돌핀이 몰핀처럼 온 몸에 퍼져있기 때문이겠지요.
똑 같이 천아숲길을 걸어도 누군가는 엔돌핀이 생성되는 기회가 되고, 누군가는 강제노역에 버금가는 육체노동으로 피로감에 찌든 온몸의 에너지가 완전 방전될 수도 있지않을까 싶습니다.
고인이 된 가수 최희준의 하숙생에서 '인생은 나그네길'이라 했고, '잘 살고 못 사는건 팔자만은 아니더라'라고 노래했듯이 세상만사 맘먹기 달렸고, 노력하기에 따라서는 팔자도 고쳐 잘 살수 있지않을까 싶습니다.
나그네가 길을 떠나듯이 잠시 왔다 가는 인생, 아등바등 거리며 죽을동말동 살기 보다는, 가끔은 나를 위해 자연과 벗해서 지친 심신에게 휴식을 주고, 자연으로 부터 위로를 받으며 사는 삶도 좋지않을까 하는 스스로에 대한 위로와 자비로운 마음을, 가을이 깊어만 가는 십일월 첫날 천아숲길로 부터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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