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1. 01.
피할 수 있는 운명(運命)과 거절할 수 없는 숙명(宿命)은 살아가는 동안 계속 만나게 됩니다.
어렴풋이 먼동이 터오는 섶섬을 지표 삼아 아직은 어두 컴컴한 방조제 마무리 공사가 한창인 서귀포항의 끄트머리로 더 좋은 해돋이 영상을 담을 욕심으로 거침없이 방조제 경계를 넘어 경사진 해변으로 바위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순수하게 바다와 태양과 하늘을 담을 욕심으로, 수분 후에 닥칠 숙명적인 해프닝은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운명을 거역한 채로 해가 바로 떠오를 것만 같은 조바심에 가능한 바다 가까이로 내려갑니다.
다행히 나름 해돋이 명당이라 생각되는 바위 위에 서서 조금은 불편한 듯싶은 자세로 섶섬을 제외하고는 온통 붉어오는 서귀포 바다의 황홀경에 푹 빠집니다.
순응하기를 거부한 운명에 대해 가혹하리만큼 뒤따라 온 숙명이 미처 인지하지 못한 이끼 낀 바위들 틈으로 나그네와 나그네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찰나에 바닷물 속으로 거침없이 끌어당깁니다.
잠시 바다와 사투를 벌인 끝에 겨우 폰을 찾아들고 정신없이 바다에서 빠져나와 카메라가 정상 작동됨을 확인하고 안도하는 숨을 내쉬며, 새벽 찬공기에 한기를 느끼며 바위틈에 의지해 붉어오는 섶섬을 바라보며 운 좋게 환생한 감사하는 마음으로 잠시 무념무상 속으로 빠져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찰나에 섶섬 너머에서 찬연히 떠오르는 십일월 첫날의 태양은 모든 걸 한순간에 치유해 주는 듯싶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바닷물이 남아 있어 감당하기 힘든 한기가 온몸에서 느껴진다 해도 떠오르는 십일월 첫날의 태양 앞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날의 사진과 동영상을 담았던 스마트폰은 숙명처럼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게 되었지만, 운명처럼 다가온 새 폰으로 지나간 폰에 담겼던 해돋이 풍경을 차분하게 정리하게 합니다.
만남과 헤어짐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뿐만 아니라, 현대인들의 스마트폰과 함께하는 일상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지난 제주여행에서 오랫동안 동고동락 하던 폰과의 이별은 운명을 거역한 숙명 같은 대가였겠지요.
그런데, 지금 이 순간에도 사경을 헤매고 있을 그 누군가는 곧 닥칠지도 모르는 세상과의 이별이 운명일까요? 숙명일까요?
운명이라면 순리대로 살아온 지난날의 흐름대로 잘 극복해 낼 수 있으리라 믿고 기도하겠지만, 하늘의 뜻인 숙명이라면 보내줄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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