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나그네 해외여행 흑역사(1) (Any declare???)

Chipmunk1 2023. 8. 30. 01:20

1991년 당시의 홍콩국제공항은 카이탁공항이라고 불렸는데, 구룡반도에 있었던, 빌딩숲과 산을 배경으로 바다에 근접한 활주로가 하나뿐인 매우 번잡한 공항으로, 1998년 7월에 홍콩섬의 서쪽에 있는 첵랍콕섬에 새로운 국제공항이 개장되기 전까지 나그네가 열 번 이상 이용했던 다소 스릴 넘치게 이착륙을 했던 짜릿한 추억이 있는 공항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1998년 첵랍콕공항이 개장되면서 카이탁공항은 폐쇄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나그네의 생애 첫 해외여행지였던 홍콩의 관문인 카이탁 공항에서 있었던 흑역사를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소개할까 합니다.

당시 아시아 지역본부가 있던 홍콩 센트럴은 말 그대로 스카이라인이 아름다운 세계적인 빌딩들이 즐비했고, 특히 센트럴뿐만 아니라 홍콩섬의 랜드마크인 빅토리아픽에서 내려다보는 야경은 절경 중의 절경이라 감탄했었던  그곳에서 한국, 일본, 대만, 싱가포르, 인도, 호주, 말레이시아, 중국등 반도체의 수요가 일정 수준 이상인 주요 국가 직원들이 모여 교육도 받고 회의도 했었고, 정작 지역본부에서 근무하는 홍콩직원들은 해외로 출장 갈 기회가 거의 없었기에, 홍콩으로 출장 오는 직원들에게 쇼핑리스트를 보내곤 했는데,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나그네도 예외 없이, 지금은 유명 상표 운동화 제조공장들이 베트남등 동남아로 옮겨갔지만, 당시만 해도 여전히 부산 등지에 유명상표 운동화 제조공장이 있었고, 거기에서 하자가 있거나 과잉생산되어 짝퉁으로 둔갑한 유명 메이커 운동화가 흘러나오던 이태원에서 운동화 세 켤레를 사다 줄 것을 요청받고, 마땅히 운동화를 넣어갈 가방이 마땅치 않아, 평소 등산할 때 텐트와 버너와 코펠 등을 넣어 다니던 70리터 크기의 대형 빨간색 트렁크(군용 따블백 스타일) 배낭에 넣어 화물칸에 싣고, 바다에 빠질 듯 간신히 활주로 끝에 멈춰 선 홍콩 카이탁국제공항에 도착해서, 입국심사대를 통과하고 화물칸에 실었던 배낭을 찾아들고 세관 검색대를 막 통과하려는 찰나에 세관 직원이 '뭐라 뭐라' 하길래 가뜩이나 친근하지 않았던 영어, 그것도 발음이 거슬리는 홍콩식 영어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고, 그렇다고 되묻기도 마땅치 않아, 그냥 큰소리로 "Yes" 해버렸습니다.

아뿔싸!
순식간에 세관원 두 명이 달려들어 배낭을 빼앗듯 심사대 위에 올리게 했고, 배낭을 열어 보라고 하니, 나그네는 당황해서 얼음이 됐고, 나그네 뒤에 있던 중년 남성이 해외여행이 처음이냐고 묻고는, 관세 신고하지 않은 고가품이 배낭에 들어있냐고 친절하게 물어봐 주었습니다. 저가 운동화 몇 켤레뿐이고, 업무차 출장 온 거라 했더니, 그 남성이 유창한 영어로 세관원들에게 상황 설명을 했고, 처음 해외에 나온 비즈니스맨인데 영어가 서툴러 잘못 대답했다고 대신 설명하는 듯싶었습니다. 그리고, 친절한 중년남성이 명함 있으면 세관원들에게 보여주라고 하기에, 당시로서는 나그네가 근무했던 회사가 누구나 알 수 있는 세계적인 반도체 회사였기에 세관원은 명함을 보자마자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통과하라고 했고, 나그네는 도움을 준 중년 남성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창피한 마음에 뒤도 안 돌아보고 택시 승강장으로 꽁지 빠지게 달려갔었던 웃픈 기억을 떠올리니,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아마도 홍콩공항의 세관원이 보기에 범상치 않은 커다란 트렁크 배낭을 짊어지고 말끔한 정장에 구두를 신은 어색해 보이는 나그네가 소위 보따리 장사로 보였을 수도 있겠다 싶더라고요.

분명 세관원은 나그네가 배낭 속에 세관신고가 안된 고가의 물건이 들어있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질문했지 싶습니다.

"Do you have anything to declare?"
혹은 줄여서 "Any declare"라고 했었을 텐데.....

잘 못 알아들었으면, 당황하지 말고 다시 천천히 얘기해 달라고 부탁했으면 좋았을 텐데 대충 "Yes"라 대답하고 지나가려는 의심스러운 행동이 세관원들의 눈에는 분명 이상하게 보였지 싶습니다.

그 일이 있은 이후로는 언제 어디서나, 잘 못 알아들었거나, 이해 못 한 단어나 용어가 있으면, 정확히 이해할 때까지 몆 번이고 다시 물어보고 쓸데없이 오해받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처신함에 익숙해졌으니, 나그네는 생애 첫 해외여행에서,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대충 넘어가면 큰 낭패를 볼 수도 있다(The devil is in the details)는 교훈이 되는 값진 예방 백신주사를 창피함이라는 대가로 지불하고 제대로 맞지 않았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