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09. 22.
어느덧 추분이 하루 앞으로 바짝 다가온 새벽 4시를 막 지나면서 용서고속도로 오산 방향 서수지 톨게이트를 통과, 장장 238km의 선운사 가는 여정을 3시간 가까이 경부, 천안논산, 당진평택, 서천공주, 그리고 호남고속도로를 거침없이 달렸지만, 서천공주고속도로 청양을 지나면서 하얀 소복차림의 구미호라도 금방 눈앞에 나타날 것만 같은 으스스하고 음산한 짙은 안개가 군산에 이르러 자동차 백밀러에 발갛게 동이 트는 하늘이 눈에 들어오기까지 이어져 잠시 속도를 늦췄을 뿐, 시속 110km로 정속 주행하면서, 지금은 투병 중인 가수 방실이(서울시스터즈)가 불렀던 가요 "첫차"의 첫 소절을 무의식 적으로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흥얼거립니다.
"새벽안개 헤치며 달려가는
첫차에 몸을 싣고 꿈도 싣고
내 마음 모두 싣고 떠나갑니다
당신을 멀리멀리"
이윽고, 오전 7시쯤 축구장만큼이나 번듯하게 넓디 너른 선운사 주차장에 도착했건만, 왠지 낯설기만 한 까닭은 오래전에 선운사 일주문 가까이에 있었던 아담한 주차장이 선운사 하면 먼저 떠오르고, 어느 초여름 새벽에 선운산 관광호텔을 동이 트기 전에 나서서 칠흑같이 어두웠던, 멧돼지 조심하라는 현수막이 도로 곳곳에 붙어있던 비포장 찻길을 가슴 조리며 트레킹 하던, 지금은 노선버스가 주차장 부근에서 회차하지만, 당시에는 선운사 일주문 앞에서 회차하던 그 시절이 선운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를 뿐만 아니라, 최근에 일신우일신 하며 상전벽해가 되어버린 선운산 관광호텔(지금의 동백호텔)과 선운사 일주문 사이의 공간에 있던 그저 그랬던 볼품없던 작은 공원들이 지금은 비포장 찻길도 없어진 채로 대단위 공원으로 거듭나 철마다 아름다운 꽃들로(봄에는 동백과 철쭉, 지금은 꽃무릇) 가득하건만, 아이러니하게도 나그네의 선명한 기억 속에는 꽤나 외지고 걷기에 다소 지루했던 찻길과 소규모 주차장이 선운사 일주문까지의 풍경으로 자리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 기억은 선운사 일주문 가는 길로 나그네의 뇌가 질병으로 오작동하지 않는 한 지속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제는 국립공원입장료도 없어졌고, 주차장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무료로 개방되었기에, 오전 7시쯤 도착해도 입장료 받는 관리인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필요도 없이 마음 편히 일주문 앞을 지나면, 거기서부터는 큰 변화 없이 예전 모습 그대로인 운치 있는 계곡을 지나 극락교 앞 선운사 현판이 높다랗게 걸려있는 선운사 현관 격인 천왕문을 지나 경내로 진입하면 대웅전 앞마당 한가운데에는 (2020년 6월에 보물 2065호로 지정된) 가로로 길쭉한 대강연장 만세루가 언제나처럼 대웅전을 마주 보고 있기에, 만세루 앞뒷문을 열어 놓으면 만세루를 통해서 보이는 대웅전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기도 합니다.
가운데 칸 높은기둥에 있는 종보(대들보 위에 설치되는 마지막 보)는 한쪽 끝이 두 갈래로 갈라진 자연재를 이용한 것으로도 유명한 만세루는, 나그네가 즐겨 찾는 경북 안동에 있는 봉정사의 출입현관 역할을 하는 봉정사의 랜드마크인 누각 만세루(지금은 보수 공사 중이라 출입 불가함)가 떠오르게 하는데, 고풍스럽고 거대한 봉정사의 만세루가 국보가 아닌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것만으로 봐도 지방문화재뿐만 아니라, 국보로도 지정된 선운사의 만세루가 얼마나 대단한 문화재인지 미뤄 짐작할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작년 여름에 시작된 만세루의 지붕 보수공사는 끝이 난 듯싶은데, 대웅전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환경 보수공사가 진행 중인 듯, 마당 곳곳에서 쪼그리고 앉아서 풀 뽑는 불자님들도 여러분 계셨고, 공사용 트럭이 대웅전 주변과 뒤편 동백숲 앞에도 여러 대 세워져 있고 인부들과 스님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아침 일찍부터 동백숲에서 지저귀는 아름다운 새소리를 상쇄시켜 버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망졸망 꽃망울을 만들고 있는 천연기념물(제184호, 1967. 2. 11. 지정)인 동백나무 숲 아래에는 동백꽃 못지않게 붉은 꽃무릇이 동백꽃이 없는 동백나무 숲을 온통 붉게 수놓은 모습이 마치 공사 중으로 야단법석인 선운사 경내를 다독이고 있는 듯 보입니다.
아직 다 지지 않은 대웅전 양쪽의 커다란 배롱나무에는 빨간 꽃이 아직도 볼만하게 매달려있고, 다소 소란스러운 경내를 나와 극락교를 흐르는 계곡 물소리와 새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계곡에 피어난 꽃무릇을 사진기에 담으려는 남녀불문 행복해 보이는 어르신 진사님들의 부지런한 모습에서 선운사의 가을을 읽고, 나그네도 선운사의 가을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꽃무릇과 눈맞춤 하면서, 동백숲을 제외하고는 꽃무릇이 보이지 않는 선운사 경내를 미련 없이 시원하게 빠져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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