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09. 22.
가파도가 청보리로 유명하다지만, 선운사에서 아무리 여유롭게 달려도 30분이면 충분히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는 고창의 학원농장 또한 청보리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나그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가파도의 청보리가 너무나도 강력해서인지 아직까지 학원농장의 청보리를 만나보고 싶은 마음의 결정을 선뜻 내리지 못한 채로 또다시 가을을 맞아 선운사의 꽃무릇을 보러 온 참에 학원농장의 가을꽃에 대한 좋은 기억을 쫓아, 오랜만에 구불구불한 시골길을 따라 학원농장에 도착하니, 코로나19 펜더믹 이전에 보았던 노랑코스모스와 코스모스, 그리고 해바라기등 기대했던 가을꽃들은 온데간데없고 메밀꽃만 너른 메밀밭 위에서 별처럼 반짝이며 가을꽃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보리밥 사잇길 대신 지난 이틀간 내린 비로 질척해진 메밀밭 사잇길을 아무런 통제나 이정표 하나 없이 파란 가을하늘 깨끗한 햇살아래 소슬바람과 친구 하며 걷는 나그네의 발걸음이 처음 몇 발짝 진흙을 피해 걷는가 싶더니, 어느새 마법에 걸린 듯 메밀밭 가운데에 서서 막힘없이 펼쳐진 메밀바다에 풍덩 빠진 채로 발아래 진흙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홀로 자연이 숨 쉬는 메밀밭 사잇길을 때론 새로 길을 내 가면서 한참을 무념무상 쉴 새 없이 소슬바람에 흔들리는 메밀꽃들과 눈맞춤하며 정해진 방향 없이 끝없이 발길 닿는 대로 무작정 걷는 호사를 누립니다.
진흙에 무거워진 나그네의 두발은 메밀밭 사잇길을 가볍게 걷고, 마음은 파란 하늘 위에 둥둥 떠있는 권두운을 손오공으로부터 빌려 타고 신나게 날아봅니다. 때마침 누군가가 띄워 올린 드론보다 빠르게 나그네의 부푼 마음이 권두운을 타고 메밀밭 위를 거칠 것 없이 날아다닙니다.
야산을 개간한듯한 메밀밭 꼭대기에 올라서니, 사방팔방 가슴이 뻥 뚫리도록 한눈에 들어오고, 목가적인 풍경에 푹 빠져 있는 나그네가 메밀밭에 스스로 갇혀 있는 것인지, 아니면 메밀밭이 나그네를 유혹해서 가둬놓은 것인지 분간할 수 없는 무아지경에 빠져버립니다.
소슬바람에 흔들리는 가냘픈 메밀꽃 위에서 밉쌀스럽게 부지런히 꿀을 따는 꿀벌들이 분주하게 메밀꽃을 옮겨 다니며 희롱하고, 메밀꽃들은 미처 저항도 하지 못하는 가련한 모습으로 소슬바람에 몸을 내어주고, 심지어 꿀벌들에게 조차 거절하지 못하고 기꺼이 몸을 내어 주고는 밀려오는 설움에 쉴 새 없이 온몸을 떨며 흐느끼고 있습니다.
중간중간에 섞여 머리에 붉은 족두리를 쓰고 있는 새색시 메밀꽃의 가을 햇살에 수줍게 웃는 모습이 호젓한 나그네를 잠시 설레게 합니다.
오늘처럼 맑은 하늘에 머잖아 휘영청 밝은 달이 뜨는 한가위가 찾아오면, 달빛이 환하게 비춰주는 메밀밭 사잇길을 무념무상으로 걷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나그네는 행복했던 고창 학원농장의 메밀꽃 필 무렵, 메밀밭에서 메밀꽃들과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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