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했던 6~7월의 장마가 끝나고, 역대급 폭염 속에서 8월을 보내고, 지난 며칠간 가랑비가 수시로 내리더니, 어느새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기운이 엄습하고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이른 추석에 뒤쳐질세라 다복하게 매달려있는 튼실한 대추가 한낮의 따가운 햇살에 온몸을 맡깁니다.
새삼 "세월 이기는 장사는 없다"라고 어릴 적부터 늘 듣던 어른들의 넋두리를 이제는 나그네가 그대로 따라 하고 있습니다.
지루했던 장마 속에서도 꿋꿋하게 가을의 결실을 위해 만발했던 대추꽃이 비바람에 떨어질까 노심초사하던 안타까움은 한낱 기우(杞憂)에 지나지 않음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 가냘픈 꽃이 애처롭게 매달려 있던 그 자리에 풍요를 상징하는 탐스런 대추가 주렁주렁 달려있습니다.
비록, 눈앞의 현실이 비바람과 폭염으로 지치고 힘들지라도, 견디고 견뎌서 시련을 이겨내면 언젠가는 튼실한 열매를 맺고, 풍요로운 가을을 맞이하게 될지니, 죽을 만큼 힘든 시간들도 잘 견뎌내면 반드시 살기 좋은 세상이 올 거라고 종교처럼 믿고 습관처럼 따르며 살아왔건만, 살면 살수록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은 점점 줄어들고, 좌절과 분노의 시간들만 늘어나, 인생길은 결코 꽃길이 아니라 고행길이라는, 자조 섞인 넋두리가 독백처럼 사방에서 들려오는 듯합니다.
내가 선택한 세상의 절대적인 권력에 배신당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릴없이 또 믿고 또 배신당하는 삶의 굴레에서 영원히 헤어날 수 없는 민초들은, 또다시 대추가 익어가는 여유롭고 풍요로운 가을을 고대하며, 세월의 수레바퀴에 몸을 맡긴 채 기꺼운 마음으로 9월을 맞이합니다.
비록, 세상이 갈수록 각박해져 가고 또 다른 시련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나그네는 묵묵히 가던 길을 멈추지 않으려 합니다.
악한 끝은 없어도 선한 끝은 있다는 신념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려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강한 자의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의 것이라는 적자생존의 법칙이 아직까지는 유효하다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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