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의 모양이 부챗살처럼 붙어 있고 꽃잎의 얼룩 반점이 마치 표범의 무늬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장마 속의 대표적인 여름꽃 중의 하나인 범부채가 반짝반짝 빛나는 검은 알보석 같은 모습으로 수확의 계절 가을을 맞습니다.
이렇게 범부채는 여름 한철 예쁜 꽃을 피우고, 다음 해를 조용히 준비하는 여러해살이 초본식물이기에 가을이면 어김없이 새까만 포도송이 같은 열매가 맺혀 조금씩 익어가며 추운 겨울을 지나고 봄을 맞으며 습기가 제거된 열매가 자연스럽게 땅에 떨어져 새순을 돋우며 한여름의 열정적인 짙은 주황의 꽃을 피우며 한여름 아침을 아름답게 꾸며주다 해가 나오면 수줍게 꽃잎을 돌돌 말아 긴 여름 한낮을 보내고, 밤새 꽃잎을 조금씩 다시 펴다가 아침 이슬에 꽃잎을 활짝 열어주는 범부채의 고단한 삶의 이면은 알지 못한 채로 이른 아침 잠시 방긋 웃는 범부채의 아름다운 자태만 기억합니다.
앞뒤 못 가리는 천둥벌거숭이 잠자리 같이 사회에 첫 발을 내 디딘 지 채 한 달도 되기 전에 천천병력과도 같았던, 그리고 한동안 격동의 시간을 보내야 했던 1026 사태가 있었던 44년 전 그날이 마치 엊그제 같은, 통금이 저녁 9시였던 그날, 홍대 앞에서 오징어 볶음에 소주 한잔 나누고 집에 갈 시간을 놓쳐 외박할 수밖에 없었던, 지금은 연락이 끓긴 김선배가 생각나는 것은, 우리가 사십여 년간 쌓아온 살만해진 대한민국이 조금씩 무너져 내려가는 것 같은 안타까움에 역사의 수레바퀴가 조금 더 빨리 돌아갔으면 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제는 청둥벌거숭이 잠자리 같은 신세는 벗어났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해진 나그네의 하루가 덧없이 또 시작됩니다.
범부채가 모진 비바람 속에서도 만개하던 인생의 한여름을 지난 나그네가 까맣게 타들어가는 범부채 열매 같은 삶의 열매를 가슴에 묻고, 그 열매가 다가 올 매서운 겨울을 잘 견디고, 새봄을 맞아 세상이 더 망가지기 전에 범부채처럼 짙은 주황색 꽃이 다시 만개하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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