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02.
실로 오랜만에 봉정사를 찾았다.
가을이 어떻게 봉정사를 꾸미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지난 겨울 부터 밀어왔던 숙제를 하는 심정으로 이른 새벽, 구도심의 역사에서 새로이 옮겨진 안동역을 스쳐 지나, 서안동 IC 쪽으로 500여 미터 달리다 오른쪽 길로 십여분 달려서 예쁜 새벽하늘이 반겨주는 천등산을 오르고 일주문을 지나 만세루 앞에 도착했다.
혹시나 운이 좋으면 산속에서 가을 해돋이를 볼수 있지않을까 기대하면서 동쪽하늘을 바라보며, 대웅전을 향해 만세루 앞에 서서 보일듯 말듯 점점 붉게 타오르는 아침노을의 끝에 나타날 해를 기다렸지만, 해가 돋는가 싶더니, 구름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특이하게도, 일주문을 지날때 부터 눈에 띄었던 현수막이 만세루에도 똑같이 걸려있었다.
만세루 대청에는 13년전인 1999년 4월에 방문했던, 故엘리자베스2세 영국여왕의 명복을 빌고 극락왕생 을 기원하는 사진들이 정갈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현존하는 목조건물으로는 최고 오래된 극락전과 극락전을 지키고 서있는 삼층석탑과 기와돌탑에도 엘리자베스2세 영국여왕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대웅전과 법고가 놓여있는 만세루에도 여왕의 체취가 남아있는듯,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더니, 세기의 인물은 그 체취 까지도 곳곳에 남기나보다.
법주사, 통도사, 대흥사, 선암사, 마곡사, 부석사등 세계유산에 등재된 나머지 6개 산사에 비해 봉정사는 아담한 규모를 하고 있었으나, 고금당과 범종각과 석조여래좌상, 그리고 삼성각등 오랜 세월을 지켜낸 불교 유산들이 잘 간직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산서원과 병산서원등 유독 유교의 전통이 깊은 서원들이 즐비한 안동에서는 규모가 가장 큰 사찰이라고 한다.
봉정사가 우리나라 7대 산사의 하나라면, 일반적으로 암자가 산속 깊히 자리하고 있다는 통설을 깨고 있는 영산암은 대웅전 오른쪽 위에 붙어있는 마치 대웅전의 부속건물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근접해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은 대대적인 보수 공사로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진 본래의 우리나라 10대 정원의 모습이 잘 보이지가 않아 조금 아쉽기는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편의 영화를 촬영할 정도라면, 미루어 짐작컨데, 노송과 배롱나무가 만들어 놓은 그늘과 우화루가 편안한 쉼터가 되어, 아늑함을 제공하는 깊은 산사 속의 안락한 정원이 본 모습일듯 싶다.
공사가 끝난 후, 새롭게 단장된 영산암의 정원이 궁금해서 머잖아 다시 찾게되지 않을까 싶다.
삶의 여백을 갖고, 여운을 남긴다는 뜻은 또 다른 만남을 스스로에게 하는 은연중의 약속인가보다.
오래된 은행나무가 하늘 높이 치솟아 천년 고찰을 수호하고, 검붉어진 산사나무 열매는 무게를 이기지 못해 땅에 떨어지고, 초여름 부터 백일 동안 세상을 예쁘게 수놓았던 백일홍도 이제는 거진 수명을 다 한듯 싶다.
산사를 내려가는 오솔길에는 서서히 낙엽이 내려 쌓이는데, 일주문 밖 노송들의, 언제나 그 자리에서 계절을 잊고 독야청정하는 의연한 자태에 반해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닮고 싶은 마음에 경의를 표했다.
언제가 될지 알수없는 다음을 기약하며,
가을빛이 점점 짙어지는 봉정사를 천등산 기슭에 그대로 남겨두고, 오래도록 머물고 싶었던 아쉬운 마음을 달래가며, 가을햇볕 만큼이나 짧지만 강력했던 봉정사를 마음속 깊히 여러번 갈무리하고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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