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타는지 갑자기 창덕궁에 가고 싶어졌다.
누가 부르는 것도 아닌데, 몸은 벌써 버스를 타고 경부고속도로 판교 톨게이트를 빠져 나와 시원하게 고속도로를 내 달린다.
이윽고, 인사동 조계사앞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창덕궁 매표소가 있는 돈화문 앞에 섰다.
삼삼오오 돈화문을 지나 인정전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난다.
인정전으로 향하는 대로가 모두를 품어 주는듯 푸근한 마음으로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긴다.
남녀노소 국적불문 수많은 인파가 그 옛날의 문무백관들을 대신 해서 인정전 앞을 가득 메워서 카메라를 들이 대기가 거북스러워 인정전의 내부 사진 찍기를 깨끗하게 포기했다.
대신 유일하게 청기와로 지붕을 한 선정전에서 왕과 왕비가 향연을 베풀던 여유로운 상상을 할 수 있어 위안이 되었다.
왕비가 생활했다는 대조전은 지붕에 용마루가 없는것이 특이했지만, 왕이 후사를 보았던 곳이였으니, 용마루가 필요없었나 하는 쓸데없는 생각도 해본다.
대한 제국의 마지막 황녀인 비운의 덕혜옹주가 말년을 보냈던 낙선제가 작년 가을 전시실로 개조되어 안타까웠었는데, 다시금 덕혜옹주가 사용하던 그대로 보존되어 있음에 안심이 되었다.
낙선제 담장 밖의 감나무에는 올해도 가지가 휘어지도록 감이 주렁주렁 달려 오는 가을을 반기는 듯 보였다.
정오로 예약한 창덕궁 후원에 들어서니, 연꽃을 모두 떠나보낸 부용지의 연잎이 섬과 연못을 거의 가리고 있었다.
국립도서관이었던 규장각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변함없이 부용지를 한결같이 내려다 보고 있었다.
지난주인가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방한해서 문대통령과 환담을 나눴던 영화당이 부용지 오른쪽에 멋진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정조대왕이 명명했다던 애련지와 금손이라 불렸던 고양이를 끔찍하게 아꼈다는 정조대왕의 뜻을 받들어 애련지 정자 옆에는 금손이가 조각되어 있었고, 영화당 마당옆 숲에는 금손이의 후손들인양 귀여운 갈색 고양이 두마리가 오수를 즐기고 있었다.
마치 한반도 지도와 흡사해 보이는 관망정의 연못에는 휴전선이 없었다.
옥류정은 창덕궁 후원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옥처럼 맑은 물이 흐르는 골짜기가 있어 붙여진 이름인데, 지금은 거의 물이 흐르지 않았고, 옥류정의 끝자락에 심어놓은 벼는 어느새 노랗게 익어갔고, 허수아비는 운치있게 청의정 앞을 지키고 있다.
이렇게 창덕궁의 전각들과 창덕궁 후원에서 초가을을 만났다.
창덕궁 후원에는 순조임금을 섭정할 정도로 영특했던 효명대군의 자취가 여기저기 숨어 있었다.
스물둘 아까운 나이에 요절하지 않고, 왕좌에 올랐었더라면 오늘 우리의 역사는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쓸데없는 "역사의 가정"에 잠시 빠져 아쉬워했다.
버스를 내리자마자 예보에 없던 비가 갑자기 내렸다.
그 비를 맞으며 흐렸던 수요일을 마무리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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