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09. 30.
청보리가 있던 지난봄, 그 자리엔 아직 덜 자란 메밀이 길었던 폭염의 여파로 지리멸렬한 애처로운 모습으로, 메밀꽃을 사진으로 남기기에는 메밀꽃에게는 흑역사가 될지도 모른다는 나그네의 배려(?)로 눈에만 겨우 담았지만, 메밀꽃보다는 시원하게 펼쳐진 가을하늘이 훨씬 더 예뻤다.
지난봄 청보리밭 사잇길은 익어가는 청보리 나락을 차치하더라도 보릿잎이 풍성하기라도 했건만, 가을의 초입에 메밀은 꽃도 이파리도 나그네의 눈에 차지 않았다.
그저 황량한 벌판에 잡초가 얌전하게 올라앉은 형국이랄까, 오늘따라 유독 영월 동강의 홍메밀꽃밭이 그립다.
어쩌면, 머릿속에는 홍메밀꽃밭의 화려함이 가득하기에, 학원농장의 메밀밭은 눈에 차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작년 이맘때 보던 그 메밀밭은 분명 아니었다.
하기사 메밀이 무슨 잘못이 있을까?
이 모든 게 다 기상이변으로 인한 기록적인 가을 폭염이 주범이기에 더 이상 메밀을 탓하지 않기로 했다.
메밀꽃 대신 메밀밭 입구에 길게 자리한 해바라기가 그나마 작은 위안을 준다.
정자 앞쪽에 백일홍 꽃밭이 조성되어 있어, 방문객들이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어 보이지만, 안동의 문화관광단지와 제천의 모산비행장과 장성의 황룡강변 백일홍과 비교하니, 그 역시 눈에 차지 않는다.
수년 전, 지금의 주차장이 들어서기 전 그곳에 있었던 노랑코스모스와 백일홍이 볼만했는데, 꽃밭을 없애고, 그 자리에 덩그마니 만들어 놓은 넓은 주차장이 오늘은 어찌 그리 을씨년스러운지, 방문객 대부분은 조금 떨어진 넓은 주차장을 이용하는 수고를 대신에 해바라기 단지 앞 길가에 노상주차금지 안내문이 무색하리만큼 촘촘히 일렬주차 해놓는 바람에 차량이 걸리적거리고 시동 거는 소리 등 소음으로 인해 해바라기를 온전히 감상할 수 없었다.
잘 만들어진 무료주차장을 버려두고, 제멋대로 주차시킨 빗나간 양심들로 인해, 해바라기 감상뿐만 아니라, 사진과 영상에 너른 들판과 하늘 대신 잡히는 자동차들을 피해 사진과 영상을 만들어야 하는 번거로움으로 인해 습도가 낮아 쾌적한 이 가을에도 불쾌지수와 짜증지수가 극에 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 부족해 보이는 메밀밭이 파란 서쪽하늘과 맞닿아 멋들어지고 시원하게 지평선을 이루고, 키 큰 해바라기 옆에서 목을 길게 빼고 바라보는 해바라기 군락 너머 메밀밭의 넉넉한 풍경이 나름 낭만적이기는 했다.
개개의 나무가 아닌 숲을 보는 심정으로, 메밀꽃과 훌쩍 자란 메밀줄기 하나하나를 감상하는 대신 작은 잡초 덤불을 연상시키는 메밀밭과 가을하늘을 한 묶음으로 보고 있노라니, 생각지 못했던 넉넉하고 편안한 풍경이 선물처럼 다가왔다.
아침에 태어난 해바라기는 오전 내내 해를 바라보다 일찌감치 해넘이를 하고, 오후에 태어난 해바라기는 이제 막 해바라기를 시작했다.
어쩌면, 만휘군상(萬彙群象)과 더 나아가 삼라만상(森羅萬象)이 해바라기처럼 서 있는 자리에 따라, 모든 것이 한순간에 결정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중생들은 아등바등 발버둥을 쳐보지만,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된 수고가 아닌가 싶다.
그저 해바라기처럼 순응하고 유유자적하게 사는 삶도 나름 괜찮은 삶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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