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30.
변변한 단풍나무 한그루 서있지 않은 병산서원에도 말라비틀어진 채로 마치 분리불안증이 있는 어린아이처럼 힘겹게 매달려있는 나뭇잎과 파랗고 높은 하늘이 내려주는 따스한 가을볕이 가을이라 굳이 얘기하지 않더라도 시나브로 가을의 정취가 겹겹이 쌓이고 있습니다.
교장실, 교무실과 더불어 강당 격인 입교당이 있는 병산서원 현판이 걸려있는 본관건물과 국가지정문화재(보물)인 만대루와 기숙사 서재와 동재 앞의 배롱나무 홍매와 청매 그리고 무궁화나무 까지도 가을의 스산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병산서원 중심에도 가을이 깊어만 갑니다.
병산서원의 랜드마크가 되어버린 400살을 훌쩍 넘긴 배롱나무 여섯 그루가 여전히 존덕사 주변을 지키면서 돌아오는 지난여름의 기록적인 불볕더위 속에서도 활짝 피었던, 그러나 이제는 거의 말라버린 꽃을 떠나보내는 애달픈 심정으로 가끔씩 나뭇잎과 꽃잎을 바람에 흩날리며 긴 휴식에 들어갑니다.
서애 유성룡 선생의 위패를 모신 존덕사 오른쪽에 제사에 관련된 업무와 제수용품등을 보관하던 전사청 기와담장에 차곡차곡 쌓인 낙엽과 이끼가 수백 년 세월을 지켜온 병산서원의 역사를 그대로 담고 있는 듯 보입니다.
복례문 앞 배롱나무에도 얼마 남지 않은 애처로운 꽃들이 가는 가을을 아쉬워하는 듯,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며 서서히 사그라지고 있습니다.
배롱나무의 위세에 눌려서 인지, 있는지 없는지 존재감도 거의 없던 모과나무도 잎을 모두 떨군 채로 무수한 인재를 배출했었던 풍요로운 병산서원을 대변이라도 하려는 듯 주렁주렁 노랗게 익은 모과를 매단 채로 가을의 중심에 우뚝 서 있습니다.
복례문 앞 배롱나무 정원의 울타리 역할을 하고 있는 산당화(명자)나무와 철쭉나무에는 숨 가쁘게 지나가는 가을에게 잠시 한숨 돌리고 가라는 착한 배려인지, 아니면 자신들의 존재감이 잊힐까 두려워서인지 예쁘게도 꽃을 활짝 피우고 있습니다.
병산서원 끄트머리에는 다산의 상징인양 노랗게 익은 은행이 주렁주렁 매달려 은행의 무게에 축 쳐진 은행나무가 다자녀 가구의 가장의 무겁기만 한 어깨를 연상케 합니다.
그리고, 병산서원의 경계를 벗어날 즈음, 대봉시가 또한 주렁주렁 매달려 풍요로운 이 가을에는 병산서원도 나그네도 나그네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하고 있는, 혹은 하고자 하는 모든 일들이 맑고 깨끗하고 높아만 가는 가을하늘 아래서 맛있게 익어가는 감처럼 떫지 않고 달콤하게 잘 익어가기를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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