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03. 12.
제주도 서귀포시 남원읍 신례동에 위치한 휴애리 자연생활공원에는 휴애리의 봄을 대표하는 유채꽃밭에 가기 전 터널을 지나자마자 관상용으로 흑돼지 사육장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아기돼지 여덟 마리가 꼬물꼬물 깨끗하게 정돈된 우리에서 엄마 돼지와 한가로이 지내는 모습이 참 여유로워 보입니다.
그 많던 흑돼지들은 온데간데없이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아 혹시, 흑돼지 사육장을 없애고 여느 동물원에서 처럼 상징적으로 흑돼지 일가족 몇 마리만 키우려 하나 생각하고 그냥 지나칩니다.
그런데, 사육장 주변에는 사람들의 인기척만 있어도 날아가는, 겁 많은 참새들이 줄을 지어 관람객이 쳐다봐도 꼼짝 않고 오히려 관람객들을 구경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문득, 흑돼지 사육 대신 참새를 사육하기로 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은 참새떼들이 관람객을 호객이라도 하려는 듯 통통하게 살찐 몸매를 뽐내며 간판 위며 나뭇가지며 매어놓은 줄 위에 무리 지어 짹짹 거리며 자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참새를 사육하기에는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듯싶으니, 참새를 사육한다는 것도 나그네의 짧은 생각인 듯싶기는 합니다.
잠시 후, 관리인이 돼지우리 곳곳에 마른 옥수수 알갱이가 주원료인 듯싶은 동물사료를 듬뿍 뿌려놓습니다.
그런데, 관리인이 돼지우리에 사료를 뿌리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참새들이 내려와 정신없이 사료를 먹는 모습을 보노라니, 새장 없이 참새를 사육하는 것이 맞긴 맞는구나 싶더라고요.
그런데, 잠시 후 뭔가 폭풍이 몰려오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들려오면서 참새들은 모두 놀라 날아가 버립니다.
그리고, 놀라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어디에 있다 나타났는지, 수십 마리의 흑돼지 무리들이 돼지우리 통로를 따라 단거리 육상선수처럼 참새들이 먹다 남긴 사료를 향해 질주해 왔습니다.
순간, 참새들이 흑돼지들의 비공식적인 기미상궁이었던지, 아니면 돼지들의 밥을 훔쳐먹는 도둑 참새였지 싶습니다.
여하튼, 참새와 흑돼지가 공생하는 모습이 휴애리를 찾는 관람객들에게는 좋은 구경거리가 되기에 충분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나그네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흑돼지 사료를 훔쳐 먹으려고 시간 맞춰서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겁 많은 참새들이 쉽게 먹이를 구하는 영민한 모습에서 참새는 결코 미련하거나 머리가 나쁜 새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반면에, 무방비 상태로 완전 무장해제된 채로 사료를 먹고 있는 참새들 위에 그물이라도 내려진다면, 십중팔구 참새들은 꼼짝없이 그물에 일망타진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또한, 다른 우리에서 식사시간에 맞춰서 또 다른 우리로 내몰린 돼지들이 허겁지겁 사료를 먹는 모습에서 뭔가 잔뜩 굶주려 있는 백성들에게 조금씩 조금씩 먹을 것을 꺼내 놓으며, 말 잘 들으라고 세뇌할 뿐 아니라, 무소불위의 철권통치를 통해 서로 분열케 여론을 조장해서 서로 물고 뜯고 싸우게 해 놓고, 끊임없이 얕은 권모술수로 권력을 탐하는 조지오웰의 소설 "1984"와 "동물농장"이 데자뷔 되는 듯한 작금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마치 우리 백성들이 참새들이나 흑돼지와는 달리, 잠시 "동료시민"이라는 주술에 걸렸다가 서서히 그 주술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새봄에 새 희망이 시나브로 꿈틀거리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표방해서 당시의 위정자였던 쿠데타 세력들이 민주화를 갈망하는 시민들의 관심을 스포츠와 축제로 돌리게 할 목적으로 1982년부터 시작된 프로야구를 필두로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된 프로 스포츠와 각종 축제들이 제법 적지 않은 국민들의 관심을 민주화의 열망과 정치에서 많이 분산시키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이 1987년, 1989년, 2016년으로 이어지면서, 적어도 우리는 참새와 흑돼지처럼 굶주린 배를 채우면 만족하는 단세포적인 본능만 있지 않음을 몸소 체득했고, 다시금 정상(正常)으로 회귀하려는 회귀본능이 살아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싶은 이 아침에 휴애리의 참새와 흑돼지가 단순하게 일차원적으로 공생하는 모습을 잔잔한 미소와 함께 되새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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