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03. 12~14.
어제 오후 예정시간 보다 조금 늦게 도착한 제주공항에 세차게 내리던 비가 한라산에는 폭설로 이어졌나 봅니다.
해돋이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호텔의 13층 위에 조성된 옥상에 영어로 루프탑(Looftop)이라는 안내판을 붙여놓은, 투숙객들에게 제공된 휴게공간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다 왼쪽 후미진 곳에서 밤새 설산이 되어 버린 명산 한라의 위용을 목도하고 잠시 할 말을 잃습니다.
나그네가 사진을 찍는 모습에 옥상을 청소하던 호텔 직원이 깜짝 놀라며 삼월의 설산 한라가 믿기지 않는 듯, 어제 까지도 눈이 없었는데, 하룻밤 새에 저렇게 눈이 쌓였다고 놀라워하며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나란히 서서 이심전심으로 설산을 바라봅니다.
뽕나무밭이 변하여 푸른 바다가 되었다는 상전벽해 (桑田碧海)가 지금 눈앞에 펼쳐진 설산 한라에 비유해도 될 듯싶게 하룻밤사이 한라는 하얀 눈에 덮여있습니다.
하기사, 요즈음 상전벽해와 같은 극심하고 흉흉한 일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고 있음에, 더 이상 놀랄 일도 없지만,
그래도, 하얀 눈에 덮인 한라산을 보고 있자니, 신라말기의 암울했던 폭정 아래 헐벗고 굶주렸던 백성들의 구세주이자 성군인 줄 알았던 폭군 궁예를 무너뜨린 왕건이 새로운 역사의 반전을 맞았듯이, 우리에게도 조금만 참고 견디면 역사의 반전이 분명히 찾아오겠구나 하는 생각에 작은 희망이 꿈틀거리며, 설산 한라가 만년설이 쌓인 영원한 우리 민족의 희망이 움트는 만년설산이 되어도 좋지 않겠나 싶습니다.
비교적 따스했지만, 소낙비에 우박을 동반했던, 어제 오후의 변덕스럽던 날씨 탓인지, 어제 아침처럼 해돋이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들른 호텔 옥상 루프탑에서 보는 명산 한라는 서서히 눈이 쌓이기 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듯 위세오름 남벽의 깎아지른듯한 윤곽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옵니다.
어제 까지는 설산이었던 한라가 하룻밤 사이에 많은 변화를 보이는 것은, 계절 이기는 장사가 없음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 동장군도 봄바람에 어쩌지 못하고 하릴없이 북쪽으로 북쪽으로 쫓겨나는 듯싶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동토(冬土)가 되어버린 이 땅에도 서서히 온기가 돌고, 민심은 천심이라는 옛말이 괜히 생겨난 게 아니란 작은 희망이 샘솟는 구름 한 점 없는 제주의 아침이 막 열리고 있습니다.
제주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이 밝아오고, 어제와 같은 시간에 조금은 미흡했던 해돋이를 보고, 또다시 호텔 루프탑에 올라, 이제는 잔설이 되어 남아있는, 어제 그제보다는 조금 흐릿하게 보이는 명산 한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변화무쌍한 세상의 흐름에 잠시 주춤했던 마음을 추스르고, 사바세계로 돌아갈 준비를 합니다.
한라산에 산철쭉이 울긋불긋 수놓고, 수국과 산수국이 제주 전역을 아름답게 수놓을 유월이 오면, 세상은 조금 더 따스해지고, 많은 바람직한 변화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으리란 포기되지 않는 즐거운 상상을 하면서, 앞에 놓인 남은 삼월과 사월과 오월이 좋은 변화를 만들면서 휙 하고 지나가길 고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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