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이야기

제주의 겨울을 찾아서(4) (한라산 윗세오름)

Chipmunk1 2024. 1. 16. 06:57

2024. 01. 09.

한라산 윗세오름(해발 1,700 미터)으로 가는 탐방로는 세 곳으로, 코스가 가장 긴 돈내코 탐방로, 그다음으로 긴 어리목 탐방로, 그리고 가장 짧은 영실 탐방로가 있는데, 돈내코 탐방로보다는 해발 1,280 미터부터 시작되는 영실 탐방로와 해발 970 미터부터 시작되는 어리목 탐방로가 많이 이용되고 있고, 나그네 역시 돈내코 탐방로는 7년 전에 한번 이용한 기억이 있을 뿐, 대부분 영실과 어리목 탐방로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중 산철쭉이 피는 6월과 눈이 있는 겨울에는 예외 없이 어리목 탐방로를 이용하게 됩니다.

작년 이맘때쯤 제주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열심히 달려 영실탐방로에 도착하였으나, 불과 5분 차이로 탐방로가 폐쇄되는 바람에 어리목의 어승생악을 대신 올라야 했었던 아쉬움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 오늘은 새벽 여섯 시 전에 호텔을 나섭니다.

24시간 영업을 하는 중문의 해장국집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동이 틀 무렵 어리목 탐방로 주차장에 도착해서 아이젠과 스패츠를 착용하고 오전 여덟 시가 되기 전에 어리목 탐방로 입구를 통과해서 제법 두텁게 눈이 쌓인 어리목 계곡을 향해 상쾌하게 발걸음을 옮깁니다.

2019년 1월 이맘때쯤과 견줘, 눈이 훨씬 더 쌓여있는 계곡 위 다리를 건너면서 계곡 양쪽에 가득한 눈을 보면서 오랜 기다림 끝에 오늘은 제대로 눈을 즐길 수 있겠다는 설렘과 기대로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어리목 탐방로 경사로 가파른 계단길을 거침없이 올라갑니다.

어리목 계곡을 지나 해발 970 미터에서 시작된 설산 한라의 윗세오름을 향한 여정은 해발 1100 미터 표지석이 눈 속에 파묻혀있을까 나와있을까 두리번거리면서 갈수록 속도가 떨어지는 눈길을 쉬엄쉬엄 무리하지 않고 체력 안배 하면서 오르고 또 오릅니다.

다행히도 해발 1,100 미터, 1200 미터, 1300 미터, 1400 미터  표지석까지 발견하고 지나면서 어리목 탐방로의 난코스를 졸업했구나 하는 안도감으로 이제부터 오롯이 설산을 즐길 수 있는 사제비동산 입구에 들어섭니다.

해발 1,423 미터부터 시작되는 사제비동산 초입에 있는 사제비 샘을 찾아 깊은 눈 속에서 시원하게 내뿜는 샘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넓게 펼쳐진 설원과 눈맞춤하면서 가벼워진 발걸음을 흡사 평지같이 느껴지는 평평한 사제비동산을 오르다 뒤를 바라보니 아스라이 북서쪽 바다가 보일 듯 말듯했지만, 지금쯤이면 윗세오름 뒤의 웅장한 백록담 북벽이 보일만도 하건만, 짙은 안개와 구름이 어찌나 두꺼운지 윗세오름 쪽은 한 치 앞도 분간할 수없기에, 속세의 복잡하고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고, 무아지경(無我之境) 속에서 무념무상하는 마음으로 뚜벅뚜벅 해발 1,606 미터에 위치한 만세동산 전망대를 향해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을 옮깁니다.

드디어 만세동산 전망대에 오르니, 세찬 바람 속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간헐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아스라이 애월바다와 산 아래 건물들이 신기루처럼 감질나게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쉼 없이 반복합니다.

바람이 어찌나 세찬지, 만세동산 전망대에서 오래 머물지 못하고, 산철쭉이 빼곡히 피어있던 사방이 툭 터진 전망대를 한 바퀴 둘러보고, 돌아오는 6월에는 철퍼덕하니 바닥에 앉아 여유 있게 물도 한 모금 마시면서 분홍색 산철쭉이 시원한 바람에 흔들리는 아름다운 풍광을 즐길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고 천천히 전망대를 내려와 해발 1,600 미터 표지석을 지납니다.

아주 잠깐 사이 구름이 산 아래서 쉬어가는 바람에, 파란 하늘이 설원 위에 펼쳐지다, 파란 하늘과 설원이 맞닿은 경계사이로 서서히 옅은 구름이 올라오니, 불과 100  미터도 채 남지 않은 윗세오름 대피소를 향해 안갯속 비구름 사이로 속절없이 걸어 들어갑니다.

가시거리가 급격히 줄어든 마지막 100 미터 구간에서 백록담 북벽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안갯속에서 진눈깨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지난 한 달간 계속된 폭설로 크고 작은 구상나무들이 자연스럽게 크리스마스트리가 되어 가물가물 시야에서 멀어질 즈음, 드디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윗세오름 오른편 대피소에 들어가 수고한 다리를 쉬게 하고 언 몸을 잠시 녹여주고,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약간 내리막 경사가 있는 해발 1,600 미터의 남벽분기점을 향해 대피소를 출발합니다.

해발 1,700 미터 윗세오름 표지석을 지나, 오후 1시에 폐쇄되는 돈내코 탐방로와 연결된 남벽 분기점을 향해 오전 11시가 되기 바로 전, 어리목 탐방로를 출발한 지 3시간 만에 윗세오름 대피소 주변의 풍경들과는 사뭇 다른 남벽 가는 길로 접어듭니다.

남벽 분기점으로 가는 길은 말 그대로 설국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한 사람이 겨우 드나들 수 있는 눈 터널이 계곡까지 이어집니다.

백록담 북벽뿐만 아니라, 남벽 분기점까지 간다 해도 전혀 보일 것 같지 않은 백록담 벽 가까이 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자아와의 격론 끝에 시작된 남벽 분기점으로의 진격은 금년 들어 가장 잘한 결정 중의 으뜸일 정도로 생전 처음 보는 눈앞에 펼쳐진 설국에 경의를 표하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유럽의 지붕이라고 불리는 융푸라우요흐에 갔을 때도 이 정도의 감동은 없었지 싶을 정도로 오늘의 윗세오름 탐방은 오래도록 기억될 멋진 추억이 될 듯싶습니다.

남벽 분기점을 되돌아 나와, 윗세오름 전망대와 영실 탐방로 쪽에 세워진 이정표를 뒤로 하고, 시인성이 매우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눈이 시작되는 듯싶기에 윗세오름 전망대를 오르려던 일정을 생략하고, 정오가 막 지나면서 약간의 눈비를 맞으며 출발지였던 어리목 주차장을 향해 잰걸음으로, 그러나 조심조심 휴식 없이 한 시간 정도 경과한 오후 1시경 어리목 탐방로 입구에 도착해서 아이젠과 스패츠를 벗고, 다음 경유지인 카멜리아힐로 향합니다.

조금씩 내리던 눈과 비가 기온이 내려가면서 눈으로 바뀌고 어느새 한라산은 폭설경보가 내려지고, 내일은 한라산이 입산금지가 될 듯싶기에, 혹여 내일로 윗세오름 탐방 일정을 잡았더라면, 올해도 윗세오름은 오르지 못하고, 어승생악을 올라야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여러 날 고심 끝에 오후 눈비 예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탁월하게 윗세오름 탐방을 결정한 나그네에게 큰 박수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