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06. 13.
예상 못했던 잦은 비로 예약과 취소를 반복하는
우여곡절 끝에 오전 네 시 오십 분쯤 인적이 뜸한
어리목탐방로 주차장에 도착하니 꿈만 같습니다.
여명이 밝아오는 새벽공기가
조금 차갑게 느껴졌지만
새소리를 위안 삼아서
어리목탐방로 입구로 향합니다.
해발 1,000 미터 표지석을 지나고,
해발 1,100 미터 표지석도 지나고,
해발 1,200 미터 표지석도 지나고,
해발 1,300 미터 표지석도 지나고,
해발 1,400 미터 표지석도 지나니,
계단이 끝나고 해발 1,500 미터 지점이 가까워 지자
마음이 많이 조급해지면서 산철쭉을 찾아보지만
이미 져버린 꽃잎이
거무죽죽하게 말라비틀어져있으니
저절로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너무 늦게 왔음을 자책합니다.
그런데, 해발 1,500 미터 표지석을 지나면서부터
아직 채 지지 않은 산철쭉이 눈에 들어오고
만세동산 주변에는 막 핀 것 같은 산철쭉 군락이
하나둘씩 그 면적을 넓히고 있음에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과 설렘이 몰려옵니다.
텅 빈 만세동산 전망대에 올라 한 바퀴 돌아보면서
분홍색 산철쭉 군락이 시야에 들어올 때마다
호흡이 빨라지고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합니다.
제주에서의 첫 번째 여정으로
윗세오름을 선택한 나를 아낌없이 칭찬하고
설렘이 가득한 마음으로
산철쭉과 적당히 예쁜 하늘을 곁들여
백만 장의 사진을 남기면서
불과 팔십여 일 전까지만 해도
눈으로 뒤덮였었던 윗세오름에서
(백록담) 남벽으로 가는 길 울타리 너머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많은
산철쭉 군락이 즐비하게 늘어서있고
눈 대신 연둣빛 숲이
산철쭉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룹니다.
(백록담) 남벽에서의 행복한 시간을 뒤로하고
해발 1,700 미터 윗세오름 표지석으로 되돌아가
윗세오름 전망대에 오르자마자
믿기지 않을 절경이 기다립니다.
하얀 구름 띠가 윗세오름 경계를 휘감고
파란 하늘이 하얀 구름과 멋진 투톤을 이뤄
울긋불긋 산철쭉 군락을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수없이 많은 갈등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와보길 잘했다고 몇 번이고 혼잣말을 합니다.
산 아래 구름이 잔뜩 끼어 우울한 마음으로
반신반의하면서 구름을 뚫고 올라와 보니
믿기지 않을 만큼 파란 하늘과 가벼운 구름이
한데 어우러져 별천지를 만들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사방을 둘러보며
두 눈에 가득 담아서
내년 이맘때까지
김장김치 묻어 놓듯
마음속에 담아 묻습니다.
예정했던 시간을 훨씬 지나 하산한 것은
아마도 윗세오름을 백만 장의 사진으로
남김없이 다 담으려 했던 욕심 때문이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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