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이야기

눈덮인 사려니숲길에서, 사려니숲길의 四季節을 되새김질 하는 나의 단상(斷想)

Chipmunk1 2023. 1. 16. 09:02

2023. 01. 07.

사려니숲길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7코스를 시작으로 올레길 첫 번째 완주 중에 추자도를 포함해서 서너 개 코스를 남겨둔 2016년 3월 어느 날, 봄비는 내리고, 비 맞으며 걷는 건 아닌 듯싶어 남원의 게스트하우스에서 머물던 중, 머잖은 곳에 우산을 쓰고도 걷기 좋은 숲길이 있다 하여 무작정 버스를 타고 갔었던 곳이 바로 사려니숲길이었고, 그렇게 봄비 내리는 날 사려니숲길과 첫 인연을 맺은 이래로 계절이 바뀔 때면 으레 찾게 되는 곳이 되었습니다.

2009년 이전까지만 해도 사려니숲길은 자동차가 다니던 운치 있는 한라산에 즐비한 도로 중의 하나였지만, 2002년도에 유네스코가 지정한 제주 생물권 보전지역(Biosphere Resev)이 되면서 자연 그대로의 숲길을 보존해야 한다는 기치아래 서서히 정비를 시작해서 오늘날의 숲길로 거듭났다 하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사려니숲길은 비자림로(혹은 붉은오름사려니숲길입구)를 시작으로 물찻오름과 사려니 오름을 거쳐가는 삼나무가 우거진 붉은오름사려니숲길입구(혹은 비자림로)로 연결되는 15km의 숲길이지만, 통상은 물찻오름입구를 경유해서 10km를 걷게 되는 제주의 숨은 비경 31곳 중 하나이며, 최근 올레길 못지않게 확장 일로에 있는 한라산둘레길 7구간 이기도 합니다.

또한, 신성한 곳이라는 뜻을 가진 '살안이'의 살과 '솔안이'의 솔이 오늘날 사려니가 되고 거기에 숲길을 더해 사려니숲길이 되었다 하는 이야기도 있고, 오름의 정상에 생성된 분화구가 북동쪽으로 경사를 이루고 있어 사려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오는데, 옛 지도에는 사려니악이라 표기되어 있다고 하니 어느 것이 정설인지 알 길은 없지만, 어찌 됐든 사려니숲길은 신성하기 그지없는 우리가 지켜내야 할 한라산의 보물 중에 하나임에 틀림없을 뿐만 아니라, 마치 붉은 융단을 깔아놓은 듯싶은 붉은오름입구는 분명 북동쪽으로 기울어진 분화구에서 용암이 흘러내리고 붉은 화산재가 내려와 쌓였음을 짐작케 합니다.

비교적 사려니숲길을 시작하기 편리한 삼나무 숲이 우거진 붉은오름사려니숲길입구에는 삼나무숲 사이로 아기자기하게 나무데크길을 만들어 탐방객들이 자연을 훼손하는 일 없이 삼나무숲을 즐길 수 있도록 조성해 놓았을 뿐만 아니라, 휠체어나 유모차등의 접근이 용이한 별도의 무장애길을 만들어 놓아 얼마나 배려심 깊은 사려니숲길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물론 대부분 전국의 유명 관광지와 탐방로에도 무장애길이 있기는 하지만, 붉은오름사려니숲길입구의 삼나무숲처럼 아름다운 무장애길은 없지 않나 싶습니다.

삼나무숲 데크길을 살짝 벗어나서 무장애데크길과 나란히 만들어진 미로숲길은 나무데크 대신 자연 그대로의 길에 천연 야자수 매트를 깔아놓아 삼나무숲을 좀 더 가까이 느끼며 걷기 좋은 또 하나의 사려니숲길 명소가 아닌가 싶습니다.

붉은 융단이 깔린 숲길을 온몸으로 느껴보기 좋은 파릇파릇한 봄의 사려니숲길은 말할 것도 없고,

신록이 우거진 비자림로에서 시작하는 사려니숲길과 청정한 사려니숲길을 대변하는 듯 청아하게 피어난 산수국과 향긋한 흰색 때죽나무꽃이 융단처럼 깔려있는 사려니숲길의 (초) 여름은 나그네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식혀주기에 적당한 그늘 아래 벤치가 마련된 환상의 트레킹 성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늦깎이 가을 산수국의 긴 여름을 이겨낸 완숙미가 돋보이고, 상아빛 누리장나무꽃이 빨간 꽃받침에 코발트빛 열매를 품고 사려니숲길의 쪽빛 가을하늘과 단풍 사이에서 깊어가는 가을을 지켜보고 있는 사려니숲길의 가을은 무어라 형언하기 어려운 신의 은총이고 하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이제 한겨울의 사려니숲길은 지나온 계절의 흔적들을 남김없이 하얀 눈으로 덮고, 또다시 새로운 계절을 잉태하기 시작했습니다.

봄 여름 가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낯설기 조차한 오솔길은 인적이 뜸하고, 숲길 어디에선가 길 잃은 노루가 튀어나올 것만 같은 적막감에 살짝 얼어버린 눈과 부딪치는 발자국 소리와 바람소리가 이따금 들려오는 까마귀 소리와 묘한 하모니를 이루며 을씨년스러운 한겨울의 사려니숲길을 한층 맑고 깨끗한 청정의 천혜 낙원으로 꾸미려는 듯합니다.

보릿고개를 넘기 힘들었던 시절, 춘궁기(春窮期)에 백성들의 주린 배를 책임져주는 구황식물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던 한라산의 터줏대감 조릿대숲 우겨진 물찻오름입구를 지나 4년 전 눈 속의 노루와 조우했던 탐방안내소 부근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잠시 맴돌다 숲 속 멀리서 들려오는 노루의 노랫소리를 들으면서 어느덧 해가 눈부시게 중천을 향하고 있는, 붉은오름사려니숲길입구에서 5.2km 지점의 물찻오름 표지석을 뒤로하고 살짝 녹아서 자칫 미끄러지기 십상인 붉은오름입구를 향하여 조심스럽게 그러나 씩씩하게 하산길을 재촉합니다.

언제나 찾아와도 반갑게 맞아주고, 자연 그대로의 품격을 변함없이 간직하고 있는 어머니의 품과 같은 사려니 숲길이 영원토록 오염되지 않은 채로 우리 후손 대대로 잘 보존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새해 마수걸이 여행의 정점이 된듯한 순백의 눈에 덮인 화이트 사려니숲길을 뒤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