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09. 07.
해발 1,330미터, 산상의 화원이라 불리는 강원도 정선군과 태백시와 영월군이 함께 만나는 만항재는 어느새 가을이 시작되었는지, 9월 초순의 한낮기온이 20도를 밑돌고 있습니다.
물론, 역대급 폭염이 한창이었던 7월 하순의 한낮 기온도 22도 안팎이었던 기억을 돌이켜 본다면, 피서는 바다로 갈 것이 아니라, 자동차 길이 잘 뚫려있는 대한민국에서 자동차로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고개인 만항재가 제격이 아닌가 싶습니다.
4월에는 얼레지꽃이, 5월에는 벌깨덩굴이, 6월에는 범꼬리와 쥐손이풀(풍로초)이, 7월에는 큰수염까지와 동자꽃과 기린초가 만개하니, 만항재 야생화탐방로의 주인공들은 달이 바뀔 때마다 차례대로 질서 있게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순리대로 반복하고 있는 듯싶습니다.
탐욕스럽고 흉측한 민낯으로 온갖 권모술수라도 동원해서 조금이라도 길게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서로 헐뜯고 싸워서 하루라도 조용할 날이 없는 사바세계의 어리석은 중생들이 만항재의 야생화들로부터 때가 되면 조용히 나타났다가 때가 되면 겸손하게 사라질 줄 아는 지혜를 배우고 익힘이 마땅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가을이 시작되는 팔월말과 구월초순에는 누가 만항재의 주인공이 되어 나그네를 행복하게 해 줄까요?
기원전 로마병정들이 머리에 쓰던 무쇠투구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투구꽃이 초가을 만항재 야생화탐방로의 새로운 주인공이지만, 여름 내내 만항재를 지켜낸 붉은 동자꽃과 연보라 이질풀꽃이 서서히 투구꽃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만항재를 떠날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숲 속 가득 세력을 넓혀가는 투구꽃들은 전통의 보라색이 대세를 이루고 있지만,
흰빛깔의 투구꽃도 숲 중간중간에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보라색투구꽃들은 일반 사병들이고, 흰색투구꽃들은 간부급 지휘관들이지 않을까 상상해 보니, 전쟁과 쿠데타와 권력다툼으로 어지러운 지구촌의 군인들과 달리 비록 투구를 쓰고는 있지만, 죽이고 죽는 전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피었다가 때가 되면 물러나는 공정과 상식을 말로만 떠벌리지 않고 실천할 줄 아는 만항재의 가을을 책임지는 투구꽃들에게 깊은 존경을 보내며 깊어가는 가을에는 어떤 꽃이 투구꽃으로부터 만항재의 야생화천국을 물려받을지 자못 궁금합니다.
그때까지도 사바세계는 여전히 총성 없는 잔혹한 전쟁이 멈추지 않을 것이고, 소리 없는 유탄에 수시로 맞아 마음이 피폐해지고 비틀거리는 날이 오면, 나그네는 마음의 천국인 만항재 야생화탐방로를 찾아와 야생화들에게 위로와 치유를 받아야 할 듯합니다.
참고로, 투구꽃은 보기와는 달리 맹독성이 있는 식물로, 화살 끝에 묻혀 독화살로도 쓰였고, 천남성과 마찬가지로 사약의 원료로도 쓰였다 하니, 가급적 눈으로만 보고 줄기를 꺾거나 꽃을 따거나 묘목을 캐다가 집의 화분에 옮기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 게 좋을 듯합니다. 투구꽃은 산속에서 생존하기에 적합할 뿐만 아니라, 일조량이 반양반음(半陽半陰)의 일정 수준으로 유지되지 않으면 꽃을 피우지 않는다 합니다. 꽃말은 "밤의 열림"이라고 하는데, 밤에 꽃잎이 열린다는 의미로 붙여진 건 아닌지 조심스럽게 추측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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