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항재(晩項齋)의 얼레지꽃
2023. 04. 26.
지리산에는 천은사에서 시작되는 해발 1102미터 높이의 성삼재를 자동차로 갈 수가 있고,
한라산에는 어리목탐방로와 영실탐방로 사이를 자동차로 지날 수 있는(혹은 제주시에서 서귀포 중문을 연결하는) 1100로의 정상에 1100 고지가 있지만,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에서 자동차로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도로는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고한리와 태백시 혈동 사이에 있는 백두대간의 함백산에 위치한 해발 1,330m에 도로 경사가 10%로 매우 가파른 만항재(晩項齋)라는 고갯길입니다.
만항재는 천상의 화원이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닐 정도로 봄부터 가을까지 다양한 야생화가 풍성하게 피어나고 이른 아침이면 안개가 밀려들어 몽환적인 풍경을 연출하는 멋진 곳이기도 합니다.
주로 높은 산에서 서식한다는, 잎은 나물로 먹고 녹말이 함유된 뿌리는 구황식물로도 쓰였다는 얼레지가 바람난 여인이란 꽃말이 무색할 정도로 봄비가 촉촉이 내리는 야생화 탐방로에서 꽃잎을 바짝 오므리고 조신하게 비를 맞고 있습니다.
꽃잎을 머리 위로 바짝 올려서 돌돌 말고 있다가 갑작스러운 봄비에 미처 꽃잎을 온전히 접지 못하고 꽃잎 끄트머리에 힘겹게 빗방울을 매달고 있는 야리야리한 얼레지꽃이 청순한 모습으로 나그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비가 그치고 해가 운무 사이로 살짝 비추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꽃잎을 열기 시작하지만, 아직은 빗방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채로 빗방울을 떨구려고 안간힘을 쓰는듯한 모습이 자못 애처롭게 보입니다.
정선의 하이원리조트에서 곤돌라(스카이 1340)를 이용해서 전망대에 오르면, 얼레지꽃을 쉽사리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안타깝게도 강풍으로 곤돌라가 운행을 하지 않는 바람에 대안으로 찾은 만항재는 봄비와 짙은 안개로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경사 심한 도로를 조심스럽게 올라가야 하는 수고를 해야 했지만, 얼레지꽃을 비롯한, 만항재는 아직 초봄이기에 들꽃이 많지는 않았지만, 옅은 코발트 색의 현호색과 하얀 개별꽃, 노란 양지꽃등등 개화를 시작하고 있기에 한 달 후면 들꽃들이 축제를 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레지꽃을 만난 것만으로도 만항재를 찾은 보람은 충분했던, 예상치 못했던 봄비와 함께 가끔은 들러보고 싶을 만항재에서의 추억을 사진첩에 담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