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이야기

외돌개 동너븐덕 마당바위, 그 거친 돌틈을 비집고 피어난 노란 등불 ‘서양벌노랑이’

Chipmunk1 2026. 6. 15. 09:59

2026. 06. 09.

유난히 가라앉은 새벽하늘이었다. 구름은 낮게 내려앉아 수묵의 농담을 그리고, 서귀포 앞바다는 거대한 침묵 속에서 숨을 고르던 시간. 카메라를 메고 외돌개 옆, 나지막이 엎드린 거대한 화산암 평전인 ‘동너븐덕’으로 향했다.

제주 방언으로 넓은 바위 언덕을 뜻하는 ‘너븐덕’. 그중에서도 동쪽에 자리했다 하여 이름 붙은 ‘외돌개 동너븐덕’ 마당바위에 서면, 가슴이 먼저 일렁인다. 오른쪽으로는 서귀포 바다를 듬직하게 지키고 선 범섬이 보이고, 왼쪽 멀리로는 새섬과 새연교의 하얀 돛대 모양 탑이 아스라하게 눈에 들어온다. 사방이 탁 트인 이 장엄한 절벽 끝에서 만나는 아침은 언제나 경이롭다.

그러나 정작 내 발길을 붙잡은 것은 저 멀리 펼쳐진 웅장한 바다 풍경만이 아니었다.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수만 년 전 뜨거운 용암이 흐르다 굳어 거무스름하고 거칠어진 화산암 피부, 그 메마르고 야윈 돌틈 사이사이를 비집고 온 힘을 다해 뻗어 나온 초록 줄기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 믿기지 않을 만큼 선명하고 화사한 노란 꽃망울들이 옹기종기 모여 피어 있었다. 바로 ‘서양벌노랑이’다.

처음에는 우리네 땅에서 자라는 토종 벌노랑이일까 싶어 가만히 허리를 굽히고 눈을 맞추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 녀석들은 외래종이라는 이름표가 무색할 만큼, 제주의 척박한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이겨내며 제 나름의 단단한 삶을 일구고 있었다.

우리 토종 벌노랑이는 대개 한 꽃대 끝에 한두 개, 많아야 세 개 정도의 꽃을 호젓하게 피워낸다. 반면, 이 거친 마당바위 위에서 만난 서양벌노랑이들은 꽃대 하나를 중심으로 대여섯 개, 많게는 일곱 개씩 꽃을 둥글게 모아 피우며 우산 모양의 풍성한 원을 그리고 있었다. 얇고 날카로운 초록빛 꽃받침 조각들은 노란 꽃봉오리를 깊고 단단하게 감싸 안았고, 갓 피어나기 시작한 꽃봉오리 끝단에는 수줍은 듯 붉은빛이 살짝 감돌았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올 때마다 가냘픈 줄기가 사정없이 흔들렸지만, 돌틈 깊숙이 뿌리를 내린 녀석들은 결코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지면을 덮듯 왕성하게 무리를 이루며 거친 바위 언덕을 노란 등불로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그 강인한 생명력을 렌즈에 담는 동안, 카메라 너머로 뭉클한 온기가 전해지는 듯했다.

척박하면 척박한 대로, 주어진 자리가 칼날 같은 바위 틈새라면 또 그런대로, 원망 없이 제 안의 가장 아름다운 빛깔을 길어 올려 꽃을 피워내는 존재. 어쩌면 이 작은 풀꽃은 내게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삶의 자리가 아무리 거칠고 외로울지라도, 우리가 피워내야 할 삶의 등불은 바로 지금 서 있는 그곳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범섬을 배경으로 낮게 깔린 아침 구름이 걷히고 나니, 동너븐덕 마당바위의 서양벌노랑이가 더욱 눈부시게 빛났다. 거친 돌틈을 비집고 피어난 저 노란 순정(純情)을 마음 한구석에 깊이 새겨둔 채, 서귀포의 푸른 새벽길을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