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06. 08.

영실탐방로를 따라 가파른 계단과 바윗길을 숨 가쁘게 오르다 보면, 해발 1600고지 부근에 다다를 때쯤 거짓말처럼 화사한 분홍빛 꽃무리가 눈앞에 펼쳐집니다. 바로 ‘붉은병꽃나무’입니다.

어찌 보면 이 친구들은 한라산의 대표 명물인 털진달래와 산철쭉의 거대한 틈바구니에 끼어 있어, 산객들에게 그리 큰 관심을 받지 못하곤 합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저 흔한 철쭉이려니 하고 무심히 지나치기 십상이지요.

하지만 가만히 발걸음을 멈추고 들여다보면 그 자태가 어찌나 예쁜지 모릅니다.

가지마다 조르르 매달린 꽃망울들이 마치 옛 선조들이 쓰던 호리병을 닮아 참 정겹습니다. 처음 피어날 때는 수줍은 듯 연한 빛을 띠다가, 높은 고도의 맑은 햇살을 듬뿍 머금으면서 이토록 짙고 매혹적인 분홍빛으로 물들어갑니다.

거칠고 메마른 고사목과 기암괴석 곁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선명한 대비를 이루며 피어난 꽃무리를 보니 한라산의 강인한 생명력이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화려한 주인공들의 그늘에 가려져 있어도, 자기만의 빛깔로 초여름 산등성이를 온통 환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재미있게도 이 아름다운 분홍빛 물결은 딱 윗세오름을 마주하기 전까지만 허락된 자연의 선물입니다. 영실의 가파른 사면을 지나 마침내 탁 트인 윗세오름 평전이 나타나면, 신기하게도 이 친구들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넓디넓은 초원이 우리를 맞이하지요.

좁고 가파른 산길을 오르느라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 힘내라며 응원하듯 피어나는 고지대의 귀한 풍경입니다.

고요한 산바람에 흔들리는 분홍빛 꽃송이들을 눈에 가만히 담아봅니다. 세찬 바람을 견뎌내며 가장 아름다운 색을 빚어낸 자연의 경이로움에, 마음에 쌓인 피로까지 맑게 씻겨 내려가는 기분입니다.

영실의 숲길이 끝나고 평전이 시작되는 그 짧은 경계에서만 만날 수 있는 유월의 숨은 주인공. 자세히 보아야 비로소 보이는 그 싱그러운 아름다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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