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이야기

산철쭉이 있는 천상의 화원, 구름 위를 걷는 길, 한라산 윗세오름과 선작지왓

Chipmunk1 2026. 6. 15. 07:00

2026. 06. 08.

해마다 오월의 끝자락에서 유월의 초입이 되면 한라산 높은 곳에는 지상의 계절보다 한 박자 늦은 비밀스러운 잔치가 열린다.

남들보다 한 걸음 늦게 피어나는 산철쭉이 아고산대(亞高山帶)의 거대한 고원을 분홍빛 융단으로 뒤덮는 시간. 그중에서도 영실 코스를 올라 마주하는 선작지왓과 윗세오름 평전은 대자연이 빚어낸 가장 거대하고도 아름다운 천상의 정원이다.
이른 아침, 영실의 가파른 비탈을 지나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쯤 눈앞의 세상이 거짓말처럼 평평하게 열린다.

오전 9시 20분을 지나면서 조금씩 벗겨지는 안개구름, 계절의 깊은 호흡을 품은 선작지왓의 초입이다. '돌이 서 있는 밭'이라는 그 이름처럼, 드넓은 벌판 위로 검은 화산암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그 사이를 초록빛 제주조릿대 무리와 수줍은 산철쭉들이 빼곡하게 채우고 있다.

아침을 맞이하는 평전은 아직 안개와 운무가 낮게 깔려 있어 무척이나 몽환적이다. 뽀얀 안개 커튼 뒤로 은은하게 비치는 윗세오름의 부드러운 실루엣은 마치 수묵화 속 숨겨진 비경처럼 신비로움을 자아내며 구름 위 천상 세계에 첫발을 디뎠음을 실감 나게 한다.

누운오름 전망대에 가까워질수록 풍경의 층위는 한층 더 두터워진다. 메마른 자갈밭과 대조를 이루며 둥글둥글하게 군락을 이룬 철쭉들은 마치 초록빛 바다 위에 떠 있는 분홍색 섬 같다. 거친 바람을 견디기 위해 키를 낮추고 다닥다닥 붙어 피어난 꽃송이들은 지상의 화려한 꽃들과는 다른 대견하고도 강인한 생명력을 뿜어낸다.

시간이 흐르며 고원의 바람이 안개를 조금씩 밀어내자, 벌판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나무 데크 탐방로가 제 모습을 훤히 드러낸다. 오전 10시를 넘기며 걷는 이 길은 온전히 자연과 독대하는 사색의 길이다. 완만하게 물결치는 푸른 평원 위로 끝없이 이어지는 나무 데크는 탐방객들을 더 깊은 정원의 심장부로 안내한다.

뒤를 돌아보면 탐방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데크 전망대가 고원의 한 점 풍경으로 녹아 있고, 사방으로 뻗어 나간 광활한 벌판은 가슴속 묵은 체증을 단숨에 날려 보낼 만큼 아득하고 시원하다.

윗세오름 대피소를 지나 만세동산과 어리목 탐방로 방향으로 발걸음을 조금 더 옮기면, 윗세오름의 중심인 '누운오름'의 포근한 뒷덜미가 넓게 펼쳐진다. 선작지왓 초입에서 보았던 거칠고 이국적인 암반 지대와 달리, 이쪽의 평전은 한없이 아늑하고 너그럽다. 완만하게 솟아오른 초록빛 사면 위로 연분홍빛 철쭉꽃무리가 파도치듯 번져나가는 모습은 부드러운 천상 천의 옷자락을 연상케 한다.

특히 정오에 가까워진 오전 11시 40분 무렵, 고지대의 평전은 절정의 서사를 완성한다. 발밑으로는 흐드러지게 피어난 철쭉 바다가 붉은 핏빛처럼 강렬한 색감을 토해내고, 고개를 들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백색의 거대한 뭉게구름과 운해가 능선 턱밑까지 사납게 차올라 출렁인다.

붉은 철쭉 융단과 하얀 구름바다가 만나는 그 경계선에 서면, 흡사 바다 한가운데 우뚝 솟은 선경(仙境)의 섬을 홀로 걷고 있는 듯한 황홀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지천으로 널린 화산암 덩어리들의 묵직한 검은빛은 화려한 꽃빛과 대비되어 이 정원이 오랜 시간 화산이 빚어낸 위대한 유산임을 조용히 웅변해 준다.

바람이 구름을 밀고 당기며 시시각각 지워냈다 다시 그려내는 천상의 화원. 비록 발걸음은 다시 지상으로 향하겠지만, 구름 위 평전에서 마주한 초록빛 조릿대의 바다와 그 위를 수놓았던 분홍빛 철쭉의 잔상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삶을 지탱하는 푸른 풍경이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