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이야기

한라산 1100고지의 지킴이, 산딸나무가 붉게 물든 이유

Chipmunk1 2026. 6. 15. 01:44

2026. 06. 07.

제주 입도 첫날 늦은 오후, 촉촉한 산비가 내리는 한라산 1100고지 탐방로를 걸었습니다. 우산 위로 툭툭 떨어지는 정겨운 빗소리에 발을 맞추며 걷는데, 탐방로에 서서 온몸으로 비를 맞고 있는 산딸나무 군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맑은 물방울을 무겁게 매달고 찬 바람에 파르르 떨고 있는 모습이 어찌나 청초하고 애틋하던지요. 가만히 다가가 눈을 맞추다 보니 문득 한 가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하얗던 꽃잎 끝이 왜 이리 핏방울이 번지듯 붉게 물들었을까?"

오늘은 비 내리는 고지대에서 만난 산딸나무 꽃, 그리고 그 속에 숨겨진 신비로운 이야기들을 풀어볼까 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분들이라면 이 산딸나무의 붉은 얼룩을 보고 가장 먼저 떠올리는 아름다운 전설이 있습니다. 서구 문화권에서는 산딸나무(Dogwood)를 무척 신성시하는데, 여기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기 때문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원래 산딸나무는 아주 크고 단단하여 예수님이 못 박히신 십자가를 만드는 데 쓰였다고 합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처형 도구가 된 것을 마음 아파하는 산딸나무를 보며, 예수님은 고통 속에서도 이렇게 위로하셨다고 하지요.

"앞으로는 누구도 이 나무로 십자가를 만들지 못하도록, 나무가 크게 자라지 못하고 줄기가 뒤틀리게 하리라."

그 이후로 산딸나무는 정말 키가 작고 단단하게 자라게 되었고, 꽃 모양에도 십자가의 흔적이 남게 되었다고 합니다.(물론 커다란 산딸나무는 여전히 종종 목격됩니다. 특히 사려니숲길)

마주 보는 4장의 꽃잎이 뚜렷한 십자가 형상을 이룹니다.

꽃잎 끝이 둥글게 파이고 갈색이나 붉은 얼룩이 남은 것은 십자가에 박힌 '못 자국'과 머리에 쓰신 '가시관'을 상징합니다.

하얀 꽃잎 끝이 붉게 물드는 현상은 인류를 위해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피)'이 스며든 것이라 믿어왔습니다.

비에 젖어 떨고 있는 하얀 꽃잎 끝의 붉은빛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왜 옛사람들이 그 모습에서 숭고한 보혈의 은혜를 읽어냈는지 깊이 공감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산딸나무 꽃잎'이라고 부르는 커다란 하얀 날개는 진짜 꽃잎이 아닙니다. 식물학적으로는 '포엽(苞葉)'이라고 부르는, 잎이 변형된 구조입니다.

진짜 꽃은 포엽 한가운데에 축구공처럼 동그랗게 뭉쳐 있는 아주 작은 초록색 알갱이들입니다. 진짜 꽃이 너무 작고 볼품없다 보니, 벌과 나비를 유인하기 위해 주변의 잎들이 화려한 꽃잎 흉내를 내며 진화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포엽 끝은 왜 과학적으로 붉게 물드는 걸까요? 여기에는 고지대 자연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산딸나무만의 영리한 생존 전략이 숨어 있습니다.

산딸나무 포엽은 처음에는 초록색이었다가 갈수록 하얗게 변하고, 수명을 다해갈 때쯤 단풍이 들듯 붉어집니다. 특히 1100고지처럼 쌀쌀하고 비바람이 강한 고지대 기후는 식물에게 큰 스트레스가 되는데, 이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붉은 색소인 '안토시아닌'을 급격히 만들어내면서 붉은빛이 돌게 됩니다.

고지대의 햇빛은 평지보다 훨씬 강합니다. 포엽의 붉은 색소는 강한 자외선으로부터 가운데에 모여 있는 진짜 꽃(암수술)이 다치지 않도록 보호하는 우산 역할을 해줍니다.

가루받이(수정) 시기가 다가오거나 지나갈 무렵, 주변의 곤충들에게 마지막으로 자신의 존재를 강렬하게 알리기 위해 색을 바꾸는 자연의 시각 효과이기도 합니다.

자연이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치열한 생존 전략인 '붉은 안토시아닌 색소'가, 인간의 깊은 신앙과 만나 '보혈의 은혜'라는 숭고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피어났다는 사실이 무척 신비롭습니다.

우산 끝에 스치는 세찬 빗소리를 들으며, 비에 흠뻑 젖은 산딸나무 꽃과 눈을 맞추던 그 고요한 시간. 차가운 빗속에서도 제 자리를 지키며 붉은빛을 피워내던 그 모습은, 사바세계 삶의 현장에서 방황하는 마음을 맑게 씻어내 주는 따뜻한 위로였습니다.

혹시 걷다가 길가에서 산딸나무를 마주친다면, 가만히 다가가 그 십자가 모양의 고운 얼굴과 눈을 맞춰보시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