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이야기

​유월의 람사르 습지에서 만난 순수, 한라산 1100고지의 윤노리나무

Chipmunk1 2026. 6. 16. 00:33

2026. 06. 07.

유월의 초입, 서늘한 고산의 공기와 신비로운 안개를 품은 제주 한라산 1100고지 생태탐방로를 걸었습니다.

이곳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고산 습지이자, 세계적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은 ‘람사르 습지’입니다. 현무암 바위틈 사이로 오랜 시간 물을 품어온 이 특별한 생태계는 육지의 숲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하고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냅니다.

지루하게 이어지던 비가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 촉촉한 습지의 안개 사이로 유독 눈길을 사로잡는 하얀 무리가 있었습니다. 거친 고지대의 비바람과 독특한 습지 환경을 온몸으로 맞아 안고서도 맑고 깨끗한 백색의 순수를 잃지 않은 주인공, 바로 ‘윤노리나무’입니다.

육지의 봄은 이미 저만치 물러갔지만, 해발 1100미터의 신비로운 습지 길목에서는 이제 막 싱그러운 여름의 미소가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람사르 습지의 물방울을 머금은 하얀 꽃송이
윤노리나무의 진짜 매력은 한 걸음 더 다가가 가만히 들여다볼 때 비로소 보입니다.
달걀을 거꾸로 세운 듯한 도란형 잎사귀에는 자잘하고 날카로운 톱니가 빽빽하게 돋아 있어, 고산 식물 특유의 싱그럽고 단단한 질감을 더합니다.

람사르 습지의 맑은 습기를 가득 머금은 하얀 꽃송이들은 자연이 갓 빚어낸 순수한 백자 같습니다.

무엇보다 압권인 것은 꽃잎 위로 사방으로 길게 뻗어 나간 단단한 수술대입니다. 그 수술 끝에 갈색과 붉은빛이 도는 꽃밥이 점을 찍듯 달려 있는데, 마치 초록빛바다 위에 흩뿌려진 작은 별빛들을 마주하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킵니다.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은 채 투명한 물방울을 달고 있는 꽃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속에 쌓여 있던 먼지마저 맑게 씻겨 내려가는 청량함이 차오릅니다.

윤노리나무라는 이름에는 정겨운 우리네 삶의 흔적이 담겨 있습니다. 전통 명절에 온 가족이 모여 즐기는 윷놀이의 ‘윷’을 만드는 나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집니다.

워낙 가지가 단단하고 질겨서 쉽게 부러지지 않기에, 예부터 농가에서는 소 코뚜레를 만들거나 윷을 깎는 데 이 나무를 귀하게 썼습니다. 척박한 고산 습지의 바위틈 앞에서도 꺾이지 않고 묵묵히 제 계절을 피워내는 단단한 생명력이 그 이름과 참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귀한 람사르 습지의 품에서 하얗게 눈꽃을 수놓았던 꽃들이 지고 나면, 그 자리에는 작은 열매들이 맺히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가을이 깊어갈 때쯤이면 그 열매들은 팥배나무의 열매처럼 붉고 고운 빛깔로 익어가며 이곳을 찾는 산새들의 소중한 양식이 되어주겠지요.

화려하게 드러나지 않아도, 세계가 보호하는 신비로운 습지 한편에서 제 자리를 묵묵히 지키며 세상을 밝히는 윤노리나무를 보며, 삶을 채워야 할 진정한 단단함이 무엇인지 나지막이 배워봅니다.

유월의 푸른 생동감과 윤노리나무의 단정한 미소가 인사를 건네는 요즈음, 마음속에 맑은 고산의 바람 한 점 들여놓으시는 여유로운 날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