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06. 07.




초록의 싱그러움이 나날이 깊어가는 유월의 첫 주말, 제주의 남국사를 찾았다. 비가 오락가락하며 대지를 촉촉하게 적시는 오후, 경내로 들어서는 발걸음마다 고요한 평온함과 함께 맑은 흙내음이 내려앉는 듯한데, 저 멀리서부터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는 강렬한 빛깔이 있었다. 해마다 이맘때면 어김없이 찾아와 절 마당을 붉게 물들인다는 병솔나무다.

가까이 다가가 바라본 병솔나무는 참으로 오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가지마다 소담스럽게 매달린 꽃방망이들은 이름 그대로 호리병을 닦는 붉은 솔을 꼭 닮았다.

우리가 꽃잎이라 생각했던 저 눈부신 붉은 갈기들은 사실 안쪽에서부터 길게 뻗어 나온 수백 개의 수술이라고 한다.

꽃잎은 차마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오직 붉은 수술들이 마음을 다해 펼쳐낸 정열의 몸짓인 셈이다.

멀리 호주가 고향이라는 이 이국적인 나무는 '청량감'과 더불어 '당신을 가볍게 해 드립니다'라는 다정한 꽃말을 지니고 있다. 마음의 번뇌를 씻어내는 청정한 도량에, 그리고 이 촉촉한 비 내리는 오후에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꽃말이 있을까.

가까이 들여다본, 맑은 빗방울을 머금은 그 정교한 붉은 수술들은 푸른 잔디와 짙은 나무들 사이에서 더욱 선명하고 깊은 제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유심히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병솔나무의 붉은 그늘 아래로 수줍게 피어난 인동초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모진 겨울을 참아내고 마침내 하얗고 노란 꽃을 피워낸 인동초의 은은함과, 하늘을 향해 거침없이 붉은 에너지를 뿜어내는 병솔나무의 화려함.

전혀 다를 것 같은 두 꽃이 촉촉한 빗속에서 한 뜨락의 배경이 되어주며 조화를 이루는 모습은, 마치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이들이 만나 아름다운 인연을 이루는 우리네 삶과도 닮아 있었다. 물기를 머금은 인동초의 향기가 비안개를 타고 한층 더 깊게 도량에 퍼져나간다.




도량의 맑은 바람이 스칠 때마다 빗방울을 품은 붉은 꽃송이들이 가볍게 흔들린다. 그 흔들림 속에서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마음에, 또 사진에 이 순간을 담아둔다.

매년 변함없이 찾아와 푸른 계절 위에 붉은 시를 써 내려가는 병솔나무처럼, 우리의 나날도 언제나 변함없는 열정과 따스함으로 물들어 가기를 조용히 바라본다. 절 마당을 나서는 길, 눈가에 남은 붉은 여운과 촉촉한 빗소리가 쉽게 지워지지 않는 서정적인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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