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월 말부터 유월 초순에 이르는 한라산은 온통 분홍빛 카펫을 깔아놓은 듯 화려합니다. 선작지왓 광활한 평원을 붉게 물들인 털진달래와 산철쭉의 군무를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영실 코스를 거쳐 윗세오름으로 향합니다. 눈이 시리도록 강렬한 분홍빛 물결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화려한 축제에 가려져, 정작 발밑과 시선 너머에서 묵묵히 빛나고 있는 진정한 고원의 보석을 놓치는 이들이 많아 못내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특히 윗세오름을 지나 백록담 남벽으로 향하는 길목, 그 거친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단정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있는 구상나무의 알록달록하고 길쭉한 열매들 이야기입니다.



"살아서 백 년, 죽어서 백 년이라는 단단하고 꼿꼿한 고목, 그 푸른 바늘잎 사이로 크리스마스트리 전구 같은 등불이 켜졌습니다."
■ 하늘을 향해 켜진 형형색색의 등불

보통 소나무나 전나무 같은 침엽수의 열매라고 하면 땅을 향해 웅크린 칙칙한 갈색 솔방울을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한라산 고원의 구상나무 열매는 전혀 다릅니다. 이 거친 고원의 아이들은 부끄러워 숨지 않고, 하늘을 향해 촛대를 세우듯 가지 위에 당당하고 꼿꼿하게 서서 저마다의 빛깔을 뽐냅니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저 초록 잎사귀의 일부로 지나치기 쉽지만, 가만히 걸음을 멈추고 렌즈를 가져다 대면 세상 어떤 보석보다 영롱한 빛깔의 그러데이션이 펼쳐집니다. 참 신비롭게도, 구상나무 열매는 단 한 가지 색으로 정의되지 않습니다. 나무마다, 심지어 하나의 가지 안에서도 저마다 다른 옷을 입고 있습니다.
■ 하나의 가지, 각기 다른 빛깔을 품은 비밀

윗세오름과 남벽 사이에서 마주한 구상나무들은 저마다 독특한 빛깔의 열매를 품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한 나무 안에서도 유독 색이 다른 열매들이 어우러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는 자연이 숨겨둔 지혜로운 생존의 법칙과 일조량의 마법이 깃들어 있습니다.
검구상나무 (짙은 보랏빛과 흑자색)

햇볕을 정면으로 강하게 받는 가지 끝이나 남향의 열매들에서 주로 나타납니다. 고원의 강렬한 자외선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천연 자외선 차단제인 '안토시아닌' 색소를 듬뿍 분비하여 깊은 보라색 등불을 켭니다.
붉구상나무 (자갈색과 붉은빛)

초록색 바늘잎 사이에서 가장 강렬한 대비를 이룹니다. 햇빛의 성분과 일조 시간에 따라 안토시아닌 발현이 극대화되면서 붉은 보석처럼 꼿꼿하게 타오릅니다.
푸른구상나무 (싱그러운 청록빛과 연둣빛)

다른 가지의 그늘에 가려지거나 안쪽에 위치하여 상대적으로 햇빛을 덜 받은 열매들입니다. 색소 발현이 적은 대신 이른 아침 숲의 싱그러움을 고스란히 담아낸 듯 청량하고 청초한 멋을 유지합니다.
이처럼 일조량의 차이와 열매가 맺힌 시간차(성숙도), 그리고 한라산의 변덕스러운 기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구상나무 고유의 '유전적 다양성'이 합쳐져 탐방로 주변을 알록달록한 전구 거리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 이른 아침, 안갯속에서 마주한 생명력


철쭉의 화려함에 밀려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비껴 나 있는 아이들이 가엾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가만히 밤새 맺힌 이슬과 거미줄을 칭칭 감고 등불처럼 서 있는 열매들을 보고 있으면 이내 가슴이 엄숙해집니다.


새하얀 안개가 밀려오는 남벽 탐방로, 아침 이슬을 머금어 보석처럼 빛나는 거미줄이 열매와 열매 사이를 잇고, 그 뒤편으로 수줍게 피어난 분홍빛 철쭉이 배경이 되어줄 때 구상나무 열매는 비로소 가장 완벽한 크리스마스트리가 됩니다. 화려하게 드러나지 않아도, 자신에게 주어진 거센 바람과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써 내려간 생명의 훈장인 셈입니다.

지나가는 이들의 탄성과 발길은 온통 철쭉 밭으로 향할지라도, 한라산의 영혼을 지키며 살아서 백 년, 죽어서 백 년(고사목)을 버텨낼 구상나무의 진정한 생명력은 바로 이 알록달록한 열매 속에 담겨 있습니다.

다음번 윗세오름 산행에서는 화려한 주연의 그늘에 가려진 이 단단하고 영롱한 조연들에게 따뜻한 눈길 한번 나누어주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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