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05. 29.

변산부안마실길 2코스, 송포항에서 고사포해수욕장으로 이어지는 길 위에는 유독 눈길을 붙잡는 숲의 터주대감이 있습니다. 오월의 끝자락이 되면 초록의 싱그러움 사이로 수천수만 개의 하얀 종들이 매달립니다. 바로 때죽나무의 계절입니다.

이 무렵 마실길을 찾는 이들의 눈길은 대개 땅 위를 화려하게 수놓은 샤스타데이지로 향하곤 합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데이지의 화사함에 마음을 빼앗긴 탐방객들은, 정작 머리 위에서 은은한 향기를 뿜어내는 때죽나무에게는 쉽게 눈길 한번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때죽나무는 서운해하는 기색 없이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킵니다. 오히려 바람이 불 때마다 조용히 고개 숙여 피워낸 순백의 꽃잎들을 숲길 위로 툭, 툭 떨어뜨립니다. 그렇게 떨어진 꽃잎들은 흙길과 나무 계단 위를 덮으며 탐방객들의 발걸음 아래 소리 없이 하얀 카펫을 깔아줍니다. 비록 시선은 받지 못했을지언정, 지나는 이들의 발길이 조금이라도 푹신하고 향긋하기를 바라는 마음처럼 말입니다.

가지마다 매달린 꽃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참으로 겸손한 자태를 지녔습니다. 하늘을 향해 활짝 날개를 펴는 여느 꽃들과 달리, 때죽나무 꽃은 종 모양의 하얀 꽃송이를 수줍게 아래로 늘어뜨립니다. 오직 허리를 숙여 올려다보는 이들에게만, 그 안의 탐스러운 노란 수술과 맑은 속살을 허락합니다. 낮게 걷는 이들만이 발견할 수 있는 숲의 숨은 별인 셈입니다.

이토록 다정한 때죽나무의 꽃말은 ‘겸손’입니다.


화려하게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아래를 향해 피어나고 떨어져서도 누군가의 길이 되어주는 그 모습에 이보다 더 어울리는 언어가 있을까 싶습니다. 5월 말과 6월 초,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하얗게 길을 비워주는 때죽나무를 보며 비로소 채우는 것보다 비워내는 것이, 드러내는 것보다 스며드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배웁니다.

화려한 세상의 주인공이 되지 않아도, 제 향기를 잃지 않고 묵묵히 누군가의 발걸음을 위로하는 때죽나무. 10개의 노란 수술이 암술을 둥글게 감싸며 호위하고 있는 모습, 그 순백의 다정함이 마실길을 걷는 나그네의 마음에 잔잔한 여운으로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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