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층 베란다에 서서 아파트 단지 내 벚꽃길을 내려다봅니다. 한밤중에 내리기 시작한 봄비는 벚꽃에게 작별의 시간을 알리네요. 조용히 대지를 적시는 빗방울을 따라, 정성스레 피워 올렸던 연분홍 꽃잎들이 하나둘, 아주 느린 걸음으로 세상에 내려앉습니다.
화려했던 시절을 뒤로하고 떠나는 꽃잎들이 애처로울 법도 하지만, 그 모습에서 오히려 담담한 평온을 보게 됩니다. 피어날 때의 설렘만큼이나 떨어지는 모습 또한 꽃의 일생이라는 것을, 이렇게 비 오는 날이면 새삼스레 깨닫곤 하지요.
비에 젖은 단지 내 보도블록 위로 쌓이는 꽃잎들은 또 다른 아름다운 꽃길을 만듭니다. 저 꽃잎들이 지고 나면 푸른 잎들이 돋아나 숲을 더 짙푸르게 채우겠지요. 속절없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음 계절을 위해 기꺼이 자리를 비워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참 편안해집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벚꽃길은 온통 하얀 눈이 내린 듯 고요하기만 합니다. 꽃잎이 흩날리는 빗속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지나가는 봄의 뒷모습을 가만히 눈에 담아봅니다.
꽃잎이 다 지고 나면 섭섭함이 남겠지만, 그 빈자리마다 일상에는 초록빛 생명력이 가득 차오르겠지요. 비 오는 아침, 베란다에서 음미하는 이 차분한 풍경이 긴 여운의 위로가 되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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