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봉선사(奉先寺)의 청풍루(淸豊樓) 앞 화단에 수줍게 숨어 핀 봉선화(鳳仙花)

Chipmunk1 2025. 8. 24. 09:08

2025. 08. 21.

봉선사 일주문(교종 본찰 봉선사)

교종 수사찰의 종풍과 선종사찰의 법맥을 그대로 전승하고 있는 대가람을 서기 969년(고려 광종 20년)에 법인 국사가 창건하고 운악사라 명명했다 합니다.

그 후 서기 1469년(조선 예종 1년)에 세조의 비 정희왕후가 세조의 능침을 이산에 모신 후 광릉이라 명명하였고, 이어 봉선사를 초창하여 선왕 능침의 명 복을 비는 자복사로 삼고, 선왕을 받든다는 의미를 담아 봉선사라 명명하였다 합니다.

따라서, 봉선사의 봉선(奉先)과 봉선화의 봉선(鳳仙)은 같은 듯 다른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이지만, 봉선사가 탄생된 배경을 기반으로 상상력의 나래를 펴보자면, 봉선화는 어쩌면 세조가 죽어서 봉황을 닮은 봉선화(鳳仙花)로 이곳 봉선사 청풍루 앞 화단에 환생한 것은 아닌지, 전혀 근거 없는 추측을 해봅니다.

큰법당으로 가는 천왕문과 같은 역할을 겸하고 있는 청풍루는 6.25 전쟁으로 전소되기 전에는 천왕문과 해탈문, 그리고 소설루(小雪樓)가 있던 자리에, 불사를 위해 신도들의 '조약돌 모으기 운동'이 결실을 맺어 1985년에 낙성을 보고, 천왕문과 해탈문, 그리고 소설루를 함께 어우르는 청풍루로 재탄생하였다 합니다.

청풍루를 지나갈 때까지만 해도, 청풍루 입구 왼쪽 화단에서 작은 숲을 이루고 있는 봉선화의 존재를 미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내장산의 내장사 대웅보전이 방화로 전소되어, 그 자리에 작은 컨테이너에 '큰법당'이란 편액이 걸려 있었던, 반추하고 싶지 않은 추억 속의 그 이름이 봉선사에는 그대로 '큰법당'이라는 한글 편액(종이, 비단, 널빤지 따위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써서 방  안이나 문 위에 걸어놓는 액자)으로 당당하게 달려 있습니다.

일찍이 봉선사의 초창(初創)은 조선 예종 1년(1469)으로, 89칸의 절 규모와 함께 서울 이북에서 가장 크다고 전해졌으며, 재창(再創)은 1637년 계민(戒敏)선사에 의한 일괄 중수(重修)때를 이른다고 합니다.

또한, 삼창(三創)은 1970년 운허스님에 의해 건립된 현 전각으로, 스님의 뜻에 따라 대웅전 혹은 대웅보전 대신에 '큰법당'이라 명명하였다 합니다.

큰법당 아래 청풍루 오른쪽 약사전(대의왕전)에 가기 전 석축을 지나 출입을 금지한 경계 너머 수풀 속에 그냥 상사화라고 불러도 무방할 분홍상사화가 무리를 지어 아름답게 피어있습니다.

황금 약사여래불을 모시고 있는 ‘대의왕전’(약사전)에는 소원성취와 만복과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기도처인 듯 불자들의 염원이 깃들어 보이는 시주 물품들이 가지런하게 놓여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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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갈 때는 보이지 않았던, 그저 우거진 수풀로만 보였던 봉선화 이파리 사이사이에서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봉황의 자태로 폭염 속의 봉선사를 대표하려는 듯, 여름꽃을 대표하려는 듯, 촉촉하게 밤새 내린 이슬이 채 마르지 않은 영롱한 물기를 머금은 채로, 신구가 조화롭긴 하지만 여전히 사찰이라는 이름이 무겁게만 느껴지던 봉선사의 여름을 속세의 때가 묻지 않은 청순하고 수줍은 시골처녀 같은 모습으로 단번에 뒤바꿔 놓았습니다.

그리고, 일일초와 풍접초와 맨드라미가 봉선화와 어울리며 여름과 가을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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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선화와 아쉬운 작별을 하고, 일주문을 향해 내려가다가 오른쪽  조각공원 초입의 작은 인공호수에서 아름답게 만들어진 자연의 데칼코마니와 자연의 소리를 감상하면서, 짧지만 강력했던 봉선사와 머잖아 봉선사를 상징하는 여름꽃으로 유명세를 탈지도 모를 봉선화를 가슴속에 담고 가을을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