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16.
기억 속의 경험에 의해 별 의심도 없이 해발 1,280 미터 지점에서부터 시작되는 영실탐방로까지 자동차가 진입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메인 주차장까지만 제설작업이 된 까닭에 자동차는 메인 주차장에 주차하고, 계획에도 없이 삼십 분 이상을 오르막 눈길을 걸어야 했기에, 모든 일정이 한 시간 정도 뒤로 미루어야 함에 소위 ‘악마는 사소한 작은 부분에 있다(The devil is in the detail)'는 속담이 떠올랐네요.
출발 전이나 전날 미리 확인을 했더라면, 일정에 반영을 하고, 당황하지 않았을걸, 작년에도 1,280 고지까지 자동차가 갔었기에 올해도 그럴 것이라는 예측에 오류가 생긴 거지요.
70-80년대, 중국에 진출하려는 서방의 기업들이 모든 계약을 마치고, 공장을 건설할 준비를 했는데, 그 시절 중국에는 발전 시설이 부족해 전기 공급이 안된다는 사실을 사전에 인지 못하고, 마지막 단계에서 계약을 멈췄다는 에피소드가 생각납니다.
아무리 사소한 부분이라도, 당연시 생각되고 잘 안다고 확신하기 전에, 한 번쯤 확인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이번 기회에 또 배웁니다.
우여곡절 끝에, 영실탐방로를 오르기 시작했지만, 비록 일기예보는 오전에는 맑을 것이라 했지만, 아름다운 영실의 운치 있는 절경은 언감생심 아무것도 보이지 않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리류로 보이는 빨간 열매와 까만 열매가 눈 속에서 살짝 얼굴을 내밀고 있는 모습에 살짝 미소가 지어집니다.
탐방로에 들어서서 조금 굼떴던 몸이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 어렵지 않게 하얀 솜으로 장식을 해놓은 것 같은 관목이 우거진 1,500 고지를 지납니다.
눈에 덮여 사라진 데크길로 만들어진 오름을 오르면서 약간 거칠어진 호흡을 달래가면서 혹시나 아침해가 올라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연신 동쪽 병풍 같은 산을 바라보지만, 끝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살아 백 년 죽어 백 년이라는 구상나무가 1,600 고지에 다다르면서 그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1,600 고지를 지나 윗세오름으로 진입하면서 시작되는 구상나무에 쌓인 눈들이 완벽하게 크리스마스트리를 구현해 냅니다.
윗세오름에 올라서자, 대형 크리스마스트리를 연상시키는 구상나무들이 뽐내기 경쟁을 하는 듯 눈들 곳을 몰라하는 나그네에게 두 눈만으론 제대로 다 감상하기가 부족하니 눈을 몇 개 더 달고 오라고 진심 조언하는 듯합니다.
윗세오름 휴게소로 가는 데크길에는 제법 눈이 쌓여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들을 비켜서려니, 발이 눈 속에 푹 잠겨버립니다.
거기에 더해 바람에 날려오는 것인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인지 눈이 세차게 얼굴을 때립니다.
윗세오름을 상징하는 눈 덮인 구상나무와 표지석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남벽으로 가려고 오십여 미터 진행하다가, 무릎까지 눈이 빠지는 길을 두고 고민하다가, 남벽 가는 일정을 포기하고 잠시 휴게소에 들어가 휴식을 취한 뒤, 왔던 길을 되돌아 조심조심 하산을 시작합니다.
영실탐방로 입구까지 내려오면서, 영실의 절경을 포기 못하고, 병풍바위산 쪽을 계속 응시했지만, 끝내 산신령이 절경을 감추는 바람에 내년을 기약하며 꿈속을 걷는 듯싶었던 설국 영실과 윗세오름의 탐방을 무사히 마칩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잘한 결정은, 제주도 입도 후 나흘째 되는 날 윗세오름에 가려던 일정을 둘째 날로 변경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만일, 원안 대로 움직였다면, 폭설로 입산금지가 되었던 한라산을 먼발치서 바라만보다 왔을 듯싶습니다.
맑고 깨끗한 계곡물소리를 들으면서, 고인 물처럼 부패하고 몹쓸 병에 걸린 듯싶은 이 세상에도 사람다운 사람들의 맑고 깨끗한 소리가 청아한 한라산 영실탐방로의 계곡물처럼 청아하게 세상에 울려 퍼져 불의를 몰아내고 선한 사람들이 발 뻗고 살만한 세상이 되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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