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 정원의 한가운데서 아나벨 수국을 마주하면 마음이 이내 차분해집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원의 주인공을 자처하며 눈부신 순백의 자태를 뽐내던 녀석들입니다. 하지만 계절의 시계가 부지런히 흐르고 여름이 깊어갈수록, 아나벨은 화려했던 흰 빛을 조금씩 내려놓기 시작합니다.
그 비워낸 자리에는 이내 싱그럽고 단단한 라임 그린의 빛깔이 차오릅니다. 식물학적으로는 꽃이 익어가며 성숙해지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라 하지만, 그 변화가 무척이나 깊은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보통의 꽃들은 절정을 지나면 시들고 바래지기 마련인데, 아나벨 수국은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꽃잎의 질감이 종이처럼 빳빳하고 야무지게 여뭅니다. 수분을 거두고 제 몸을 가볍게 만들면서도, 빛깔만큼은 청량한 초록으로 되돌려 정원을 묵묵히 지키는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어쩌면 사람의 삶도 이와 닮았을지 모릅니다. 뜨겁고 화려했던 성취의 순간을 지나, 힘을 조금 빼고 나만의 온전한 빛깔로 돌아오는 일. 세상의 시선에 맞춘 화사함이 아니라, 내면을 단단하게 채운 연둣빛 담담함으로 머무는 일 말입니다.
오늘 아침 마주한 저 연둣빛 아나벨 수국송이들은 우리에게 조용히 속삭이는 듯합니다. 화려한 절정만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제 색깔을 찾아 묵묵히 익어가는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가장 단단하고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말이지요.

이 맑고 단단한 초록의 울림을 마음에 담아, 고요히 시 한 편을 띄워봅니다.

다시 초록으로 깊어지다

한여름 뜨겁던 고백의 시간
순백의 눈송이로 피어나
세상을 온통 환하게 밝히더니,
계절이 한 걸음 깊어가는 길목
너는 화려한 외출을 끝내고
다시 평온한 제자리로 돌아온다.
비우고 나니 비로소 채워지는 빛깔,
가장 뜨거울 때 흰 옷을 벗어던지고
숲을 닮은 담담한 연두로 물들어가는 너.
고개 숙이지 않는 단단함으로
바람이 불어도 흔들릴지언정
이제는 쉽게 꺾이지 않는 무게를 품었다.
꽃이 지는 것이 아니라
빛깔이 익어가는 것임을,
스스로 낮추어 온전히 제 색을 찾는
너를 보며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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