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매화가 떠난 자리에 핀 붉은 연가(戀歌)

Chipmunk1 2026. 4. 30. 06:00

이른 봄, 은은한 향기로 마음을 설레게 했던 고불매(古佛梅)의 자취를 찾아 다시 백양사로 향합니다.

꽃이 지고 난 자리는 늘 쓸쓸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늘 마주한 풍경은 예상치 못한 강렬함으로 나그네를 불러 세웠습니다.

매화가 머물다 간 그 자리에는 어느새 영산홍이 붉은 불꽃을 피워내고 있습니다.

아침 안개를 뚫고 솟아오른 햇살이 꽃잎에 닿자, 영산홍은 역광 속에서 투명하게 빛나며 마치 스스로 타오르는 듯합니다.

고즈넉한 기와지붕과 무채색의 흙담은 이 화려한 붉은빛을 온전히 받아내며 산사의 정적을 깨웁니다.

무언가에 홀린 듯 셔터를 누릅니다. 매화가 선비의 절개를 닮은 담백한 아름다움이었다면, 이 영산홍은 계절이 보내는 뜨거운 안부와도 같습니다.

떠난 것을 아쉬워할 겨를도 없이 찾아온 이 눈부신 생명력 앞에서, 나그네는 한참을 머물며 봄이 정점으로 치닫는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