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용마루 없는 창덕궁 대조전

Chipmunk1 2026. 2. 9. 05:45

2026. 01. 14.

(층층의 시간이 겹쳐진 곳, 대조전)

창덕궁의 깊은 품으로 들어서면, 왕비의 공간인 대조전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 시작을 알리는 선평문은 높은 계단 위에 위엄 있게 서서, 이곳이 궁궐 안에서도 가장 은밀하고도 존귀한 처소임을 말해줍니다. 문 너머로 보이는 정갈한 마당은 왕실의 기품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발걸음을 옮겨 대조전 마당 안으로 들어서면, 우리를 가장 먼저 맞이하는 것은 낯설고도 흥미로운 돌출형 현관을 가진 희정당입니다. 전통적인 단청 아래로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게 설계된 이 포치(Porch)는 조선의 시간이 근대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탄생했습니다. 1917년 화재 이후 1920년에 다시 지어지며, 가마 대신 자동차를 타던 왕실의 변화된 일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주한 대조전 본채. 지붕 위의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 형태는 하늘과 땅의 기운이 온전히 왕비에게 닿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고 있습니다. 내부의 화려한 샹들리에와 서양식 가구들은 화려했던 왕실의 마지막 모습과 그 이면의 쓸쓸한 역사를 동시에 비춥니다. 과거와 근대, 그리고 오늘날의 우리가 만나는 이곳 대조전은 단순히 멈춰있는 유적이 아니라, 층층이 쌓인 시간의 기록입니다.

(무량(無梁)의 하늘 아래 자동차가 멈추고)

선평문 높은 문턱을 넘는 바람은
왕비의 치맛자락처럼 조심스러운데
눈 덮인 마당 위로 쏟아지는 동지의 햇살은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네

화려한 단청 아래 불쑥 고개를 내민 희정당
말 울음소리 잦아든 자리에 자동차가 멈추고
가마에서 내리던 그림자, 문을 열고 들어서니
어느새 조선의 시간은 근대의 숲을 지나네

용마루 없는 지붕은 하늘을 가리지 않아
무량(無梁)의 공간으로 별빛이 내려앉는 밤
서양식 전등 아래 외로이 남은 옥좌에는
못다 한 이야기들이 샹들리에처럼 반짝이네

과거와 미래가 악수하듯 마주 선 처마 끝에
오늘도 우리는 켜켜이 쌓인 세월을 읽으며
멈춰 선 시간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