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이야기

갈색 씨방에 새긴 봄의 서곡

Chipmunk1 2026. 3. 16. 00:22

​한국의 10대 정원으로 사랑받는 안동 봉정사 영산암의 뜰에는 지금, 겨울의 끝자락을 밀어내고 봄의 시작을 알리는 은밀한 신호가 가득합니다. 수백 년 세월을 지탱해 온 노송의 거대한 그늘 아래, 작지만 강인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큰꿩의비름'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지난해의 화려했던 분홍빛 기억을 모두 비워낸 자리에 남은 것은 빛바랜 갈색의 꽃대뿐입니다. 하지만 이 마른 줄기 끝에 매달린 수천 개의 별 모양 씨방들은 결코 쇠락의 상징이 아닙니다. 오히려 차가운 서리를 견디며 제 몸을 말려낸 그 단단한 뼈대 속에, 다시 깨어날 새 생명의 문장들을 촘촘하게 갈무리해 둔 희망의 저장소입니다.

​영산암의 낮은 담장과 굽이치는 소나무 가지가 만들어내는 선의 미학 속에서, 큰꿩의비름은 '평화'와 '부적'이라는 자신의 꽃말처럼 정원의 평온을 지키고 있습니다. 화려한 꽃망울보다 먼저 도착한 이 갈색의 전령은, 비워내야 비로소 새로운 계절을 채울 수 있다는 자연의 섭리를 온몸으로 증명합니다.

​소나무 아래 정지된 듯한 갈색 꽃대를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비바람에 흩어지지 않고 제 자리를 지켜낸 인내 끝에, 이제 곧 저 낮은 땅 밑에서는 파릇파릇한 새순이 고개를 내밀 것입니다. 영산암의 고요한 공기를 먹고 자란 큰꿩의비름이 전하는 이 담백하고 힘 있는 봄의 소식은, 우리네 삶 역시 고단한 계절을 지난 후에야 비로소 가장 깊고 아름다운 향기를 낼 수 있음을 나직이 속삭여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