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이야기

​봉정사 만세루 담장 아래서 맺은 봄의 붉은 인연

Chipmunk1 2026. 3. 4. 05:11

천년 사찰의 고요가 머무는 문턱
만세루(萬歲樓) 거친 기둥을 마주하기 전
오른쪽 외곽 뜰, 낮은 담장 발치에
누가 이토록 시리도록
뜨거운 고결(高潔)을 심었는가.

엘리자베스 여왕이
"가장 한국적인 아름다움"이라 찬탄하며
천천히 보폭을 맞추던 그 고즈넉한 길목,

바랜 단청은 세월 속에
제 빛을 잃어 무채색인데
담장 아래 홀로 깨어난
저 충실(忠實)한 홍매화는
얼어붙은 산사의 풍경소리 받아 적으며
꽃잎마다 붉은 사연 꾹꾹 눌러 담았으리.

대웅전으로 향하던
바쁜 발길 잠시 멈춘 자리
인내(忍耐)의 끝에서 터진
향기가 죽비처럼 내려
세상 밖 소란했던
마음의 먼지를 씻어내고
비로소 결백(潔白)한
봄의 얼굴을 마주하게 하네.

늙은 나무는 비우는 법을 몸소 보이고
꽃은 피어나 찰나의 눈부심을 증명하니
만세루 담장 아래, 이 발길 머무는 자리가
오늘 내가 얻은 가장 향기로운 공양이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