볕이 머문 자리, 납매(臘梅)

유난히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던 날, 전주수목원의 고즈넉한 길목에서 발걸음을 멈췄습니다. 겨울의 끝자락을 보듬는 온기 속에, 차가운 기를 뚫고 피어난 노란 꽃망울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바로 '납매'였습니다.

섣달(음력 12월)에 피는 매화라는 뜻을 가졌지만, 겉꽃잎은 투명한 크림색이고 안쪽은 진한 자줏빛을 띠는 아주 특별한 꽃입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마치 매끄러운 밀랍(臘)으로 빚어놓은 듯, 햇살을 머금고 반짝이는 모습이 참 신비롭습니다.

이 투명한 아름다움 때문인지 서양에서는 '윈터스위트(Wintersweet)'라는 달콤한 이름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이름 그대로 한겨울의 고요를 깨우는 향기로운 존재이지요.

옛 문인들은 이 꽃을 보고 얼음처럼 맑은 뼈와 옥처럼 깨끗한 살을 가졌다는 뜻의 '빙기옥골(氷肌玉骨)'이라 칭송했습니다. 겉보기엔 한없이 가냘프고 여려 보이지만, 사실은 영하의 추위를 뚫고 가장 먼저 향기를 틔워내는 강인한 생명력을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납매의 꽃말은 '자애'와 '함께하는 사랑'입니다. 아무도 꽃피울 엄두를 내지 못하는 삭막한 계절에 홀로 피어나, 지나가는 이들에게 가장 먼저 봄의 기운을 나누어주는 그 마음이 참 다정합니다. 남들보다 앞서 걸으며 주변을 따뜻하게 보듬는 그 온기는 꽃말의 의미와 꼭 닮아 있습니다.

그날 마주한 납매는 따스했던 햇살을 머금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듯했습니다. 이제 겨울의 끝자락이니 곧 눈부신 봄이 올 거라고 말이지요. 가장 먼저 깨어나 건네준 이 노란 희망의 기운이, 일상의 틈에서 이 글을 마주한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산뜻하고 향기롭게 닿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