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서원에서 겨울의 끝자락을 만났다
조선 중종 때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우리나라 성리학의 효시라 추앙받던 고려말의 안향선생을 기리기 위해 안향선생의 고향이기도한 지금의 영주에 백운동(白雲洞)이라는 이름으로 안향선생의 사묘(祠廟)를 세우고 서원을 만들었는데, 1549년(명종 4) 풍기군수 이황(李滉)의 요청에 따라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명종 친필의 사액(賜額)이 내려졌다고 한다.
이른바, 정부의 지원을 받는 우리나라 사학의 효시가된 셈이다.
안타깝게도 주세붕과 퇴계이황의 건학이념이라 할수 있는 선비들의 청빈한 입신양명의 뜻이 많이 퇴색하여 정부(조정)의 특혜를 등에 업고 (오늘날의)재단법인임에도 불구하고 사학을 이용한 사리사욕을 도모하다 서원철폐라는 극약처방을 받은 적도 있었지만, 조선의 건국이념인 유교의 번성을 위해 정부(나라)가 지속적인 서원의 발전에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해온 전통이 오늘날 사립학교의 근간이 되지 않았나 싶다.
물론, 사학을 통한 끊임없는 비리가 암약하고 있는 현실이 때론 모두를 분노케 하기도 하지만, 나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한, 크게 신경쓰는 사람은 매우 드문 세상이니 후학을 위한 사학의 설립은 어려웠던 시절 선각자들의 몫이었고, 지금의 사학은 설립자 본인의 뜻과는 무관하게 그 일족의 향유물로 전락하는것이 안타까운 현실임을 부인할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서원 왼편에 조성된 선비촌은 오늘날 기숙학원과 비슷한 의미로 만들어 진듯한 느낌을 받았으나, 그 옛날 선비들의 청빈하고 검소한 삶을 엿볼수 있도록 소박하게 꾸며져 있었다.
초가집과 장독대가 어린시절을 생각나게했고, 대문도 없는 작은 집앞을 지날때는 밥 먹으라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듯 했다.
수국과 목련과 산수유가 빼곡한 울타리를 지나고, 마당을 돌면서 어린시절로 되돌아간듯한 착각에 시간 가는줄도 모르고 추위도 잊고 행복한 시간들로 가득 채웠던 나홀로 즐거운 겨울의 끝자락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