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청기와 선정전 어좌
2026. 01. 14.

(일월오봉도, 전등 불빛 아래의 왕)
창덕궁 선정전의 푸른 기와 아래로 발걸음을 옮겨 내부로 들어서면, 바깥의 고요한 풍경과는 또 다른, 압도적인 색채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붉은 기둥과 푸른 단청이 어우러진 공간의 중심에는 어좌(御座)가 묵직하게 놓여 있고, 그 뒤로 조선 왕실의 영원한 상징인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가 위엄을 더합니다.
해와 달, 다섯 봉우리, 그리고 소나무와 폭포가 어우러진 일월오봉도는 단순히 아름다운 그림을 넘어선 철학적 우주였습니다. 그림 한가운데 비어 있는 왕의 자리에 앉아야 비로소 우주 만물이 조화를 이루는 완성된 세계가 펼쳐진다는 믿음. 왕은 이 그림 속에서 스스로를 자연의 일부이자 만물의 중심에 서는 존재로 인식하며, 백성들의 삶을 책임지는 막중한 의무를 다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완벽해 보이는 전통의 공간 속에서, 뜻밖의 풍경이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바로 어좌 위 천장 부근에 매달린 서양식 전등입니다. 고색창연한 단청과 용봉 문양 사이로 전구를 감싼 유리등이 어색한 듯 조화롭게 빛을 내는 모습은, 격변하는 근대 문명의 파도 속에서 조선 왕실이 겪었던 고뇌와 변화의 바람을 웅변하는 듯합니다. 전통을 지키려 애쓰면서도 새로운 문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시대의 갈림길. 아마도 어좌에 앉았던 왕은 저 낯선 전등 불빛 아래에서 어떤 미래를 꿈꾸고, 어떤 절망을 느꼈을까요.
선정전 내부는 단순히 화려한 왕의 집무실이 아닙니다. 일월오봉도가 상징하는 변치 않는 이상향과, 전등이 밝히는 새로운 문명의 빛이 교차하는 지점입니다. 이곳은 지나간 역사의 숨결과 다가올 시대의 그림자가 공존하며, 묵묵히 그 모든 것을 지켜본 시간의 증인입니다. 우리는 그 공간 속에서 과거의 왕들이 품었던 희망과 절망을, 그리고 그들이 꿈꾸었던 영원한 나라의 모습을 잠시나마 엿볼 수 있습니다.

(어좌, 일월의 품에 안겨)
청기와 지붕 아래 다시 선다
붉은 단청의 용틀임, 벽화 속 봉황이 꿈틀
가운데 우뚝 솟은 어좌
임금의 무게를 견디던 붉은 심장
그 뒤로 펼쳐진 일월오봉도
푸른 산세, 굽이치는 물결
오봉 사이로 해와 달이 뜨고 지네
그 중앙 빈자리에 비로소 앉으사
세상의 이치를 완성하던 왕의 고뇌
어둠 드리운 천장 아래
홀연히 밝아오는 유리 전등
고색창연한 유배지에 스며든
낯선 빛의 속삭임은
백여 년 전 고종의 망설임이었을까
새로운 시대를 향한 작은 몸짓이었을까
오색찬란한 무늬 속 정적
나는 지금, 지나간 시대의 한숨과
다가올 미지의 희망이 공존하던
그 찰나의 공간에 서 있다